한국교회 아픔과 자랑 온전히 품다

▲ 아치형 창문과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승동교회당 외벽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1912년 완공된 유서 깊은 예배당 곳곳에는 유무형의 사회문화적 가치 담겨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외곽, 반원형 아치 모양으로 꾸며진 창문, 십자형의 삼량식 박공지붕. 고풍스러운 예배당의 전경은 라틴 계열의 건축양식을 전형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누구나 한눈에 보더라도 범상치 않은 건물임을 느낄 수 있다.

▲ 서울시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된 승동교회 예배당.

착공한 지 2년만인 1912년 완공된 서울 승동교회 예배당은 2001년 4월 서울특별시 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의 벽체와 창호 주변, 지붕과 바닥 틀 등은 20세기 초 서양식 건축기술의 정착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게 문화재 지정의 이유이다.

전통문화의 향기가 물씬한 종로구 인사동 한복판에 자리 잡은 위치 또한 절묘하다. 종묘, 창경궁, 보신각, 태화관, 탑골공원, YMCA, 낙원상가 등 중세부터 근대와 현대의 문화적 자취들이 교차하는 거리 골목들을 쏘다니다보면 어느새 발걸음이 승동교회 앞에 멈춰있는 것이다.

외관은 그대로 둔 채, 내부는 현대적으로 개조한 이 예배당은 건축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주일예배를 비롯한 모든 공예배와 주요 사역의 공간으로 사용된다. 제101회 총회가 김제 금산교회 ‘ㄱ’자 예배당과 함께 승동교회 예배당에 대해 한국교회역사사적지 지정을 결의한 것은 바로 이 유서 깊은 예배당이 간직한 문화적 가치와 함께 사회적·역사적 의미 또한 크기 때문이다.

▲ 승동교회당이 3·1운동의 발상지임을 알리는 표지석.

승동교회의 출발은 미국 북장로교 소속 새뮤얼 무어(한국명 모삼율) 선교사가 곤당골교회를 설립한 18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늦은 밤 굳게 닫힌 남대문 성벽에 밧줄을 걸고 넘어 서울에 첫 입성했다는 무어 선교사의 스토리는 생생한 전설처럼 남아있다. 무엇보다 그는 마을과 거리를 돌아다니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고운 담으로 연결된 곳이라 해서 ‘곤담골’ 혹은 ‘곤당골’로 불리던 동네는 무어 선교사의 사택이 있었던 곳이다. 조그마한 개천이 흐르던 이 동네에는 일단의 백정들도 모여 살았다.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전파된 복음은 신분제 사회에서 홀대받던 이 무리들을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장로교회로 이끌었다.

▲ 승동교회의 대표적 문서사역인 ‘승동공보’가 교회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다.

양반 출신들 중에서는 회심한 후에도 천민들과 한 공간에서 예배하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무어 선교사는 단호했다. 복음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은 그에게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가치였다. 자연히 곤당골교회는 신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찾아와 어울리는 신앙공동체가 되었다.

그 중 한 사람 박성춘 장로가 바로 백정 출신이었다. 콜레라에 감염되었다가 고종황제의 주치의였던 에비슨 선교사로부터 직접 치료를 받아 완쾌한 후 교회를 나오기 시작한 그는 훗날 독립협회 등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인물이 되었고, 아들 박서양은 세브란스를 졸업한 최초의 한국인 외과의사로서 숭신학교와 구세병원을 세우고 독립군 군의관으로서도 활약한다.

▲ 삼일운동 당시 차상진 목사가 작성해 일본 총독부에 제출했다는 ‘12인등의 장서’.

 곤당골교회가 승동교회로 변신하기까지에는 몇 번의 굴곡진 사연과 과정들이 있었지만, 설립 당시부터 교회가 지녀온 정체성과 방향에는 변함이 없었다. 당초 지역명을 따서 지은 ‘승동(承洞)교회’라는 이름은 길선주 목사의 사경회 당시 절골(寺洞)을 극복하는 교회가 되라는 의미를 붙여 ‘승동(勝洞)교회’로도 불려진다.

승리하는 교회라는 명칭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상징적이었다. 나라를 빼앗기던 1910년, 율곡 이이 선생이 살았다는 집터 위에 건축이 시작된 현재의 교회당은 완공된 이후 복음의 통로이자, 애국신앙인들의 근거지 역할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19년 삼일만세운동 당시 승동교회의 활약상에서 드러난다.

▲ 1912년 완공되었을 당시 승동교회당의 모습.

당시 만세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학생들이 모여 의논한 장소가 바로 승동교회당 1층의 밀실이었고, 수많은 학생들을 이끈 대표적 리더 중 한 사람이 승동교회 청년면려회장을 맡고 있던 연희전문학교 학생 박희도였다. 당시 승동교회를 담임하던 차상진 목사는 ‘12인등의 장서’라는 이름으로 총독부를 향해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격문을 직접 작성해 제출하기도 했다.

또한 승동교회당은 보수신학과 신앙을 지키는 요람으로서도 큰 역할을 했다.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 문제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할 당시, 승동교회는 그 중심에 서있었다. 합동측은 그해 11월 23일 승동교회에서, 통합측은 앞서 9월 29일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며 각자의 길을 걷게 됐다.

▲ 조선왕실의 후손 중 최초의 목사였던 이재형 목사의 유품들.

이 때문에 승동교회는 한 동안 ‘승동측’이라는 이름으로 합동을 대표하는 존재로 부각됐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교단 분열의 혼란을 온 몸으로 겪어내며 기나긴 내분에 시달려야 하는 아픔이 존재했다.

이처럼 120년간 이어져온 승동교회 영욕의 세월은 교회당 진입로에 2010년부터 전시되고 있는 역사사진전과, 같은 해 4월 개관한 승동역사관, 그리고 예배당 동쪽 마당에 복원된 종탑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 겨레의 문화를 피부로 느끼고 싶다면 인사동을 찾아가듯, 우리 총회의 역사를 실감하고 싶다면 승동교회를 우선 찾아가라는 조언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승동교회는 교단의 역사 그리고 장로교회의 광음, 나아가 한국교회의 소중한 세월들이 녹아있는 소중한 역사창고이다.
 

▲ 승동교회의 소중한 자산인 역사를 잘 보존하고, 선교사로부터 받은 복음의 빚을 열심히 갚겠다고 다짐하는 박상훈 목사.

26년간 승동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는 박상훈 목사는 승동교회의 저력은 성경을 중심으로 한 견고한 신앙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한다. 성도들의 고령화와 빠르게 진행된 도심 공동화로 목회환경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지만, 흔들림 없는 신앙으로 이를 극복한다고 자부한다.

“만세운동의 발상지로서 예전에는 매년 삼일절에 기념예배를 열며, 120년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역사관을 건립하고, 100년사에 이어 110년사까지 연이어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정말 드러내며 자랑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지금도 한국교회와 총회의 뿌리를 찾아 방문하는 이들이 많고, 총회에서 역사와 관련된 기념행사가 있을 때마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입장이어서 승동교회 담임목사로서 큰 책임을 느끼고 있다는 박 목사는 앞으로 선교사역에 더욱 주력할 것을 다짐한다.
“올해까지 총 다섯 가정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국내외에 15개 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복음을 위해 국내 뿐 아니라 해외 곳곳으로도 나가 섬기셨던 역대 담임목사님들과 성도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옛 선교사들에게 진 복음의 빚을 갚아가려 합니다.”

탁월한 목회자들, 승동교회 강단 지켰다 

승동교회의 진정한 자산은 사람들이다. 특히 역대 승동교회 강단을 지킨 목회자들 중에는 한국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탁월한 경륜과 업적을 남긴 이들이 많다.

▲ 승동교회 역사관에 전시된 역대 담임목사들의 면면.

무어(한국명 모삼율) 레이놀즈(한국명 이눌서) 클라크(한국명 곽안련) 선교사에 이어 한국인으로 첫 담임목사가 된 이여한 목사는 원래 승동교회 초대 장로 중 한 사람이었고, 훗날 일본에 전도목사로 파송된다.

이어서 삼일운동에 가담했다가 옥고를 치른 차상진 목사, 청빈한 삶과 뛰어난 필력으로 기독신보 주필을 지낸 김영구 목사, 조선 왕실의 후손으로 최초의 목사가 되어 평생을 무보수로 섬겼던 이재형 목사, 예수교연합공의회장과 기장 총회장 등을 역임한 박용희 목사, 부흥사로 명성을 떨쳤던 순교자 김익두 목사, 일본 유학생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오건영 목사, 맹아선교에 크게 공헌한 이덕흥 목사 등이 해방 무렵까지 강단을 이어 지켰다.

이후에도 독립운동가 출신의 홍대위 목사, 중국 선교사로 활약했던 이대영 목사, 공산권 선교에 앞장섰던 박일웅 목사 등 다양한 이력을 지닌 목회자들이 사역했다.

평신도들 중에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몽양 여운형, 조선신학교 설립자였던 김대현 장로, 교단 부총회장을 지내며 총신대와 기독신문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벽산그룹의 김인득 장로, 부산 피난 시절 교회를 규합했던 한수산 장로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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