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서호 목사(동산교회)

▲ 남서호 목사(동산교회)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 법이 제정되고 그 결과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데 과히 충격적이다. 근 50여 년간 산업발전과 함께 향락과 퇴폐풍조가 함께 자라나 깊이 토착해 버린 것 같다. 왜냐하면 고급 요정, 식당가가 및 써비스업이 아우성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퇴폐생활의 논리는 단순하다. 돈으로 재미를 쉽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교제, 인사, 회의 등 공금사용이 광범위한 풍토이고 보면 유흥가는 번창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돈이 돌 수 있는 것은 경제발전에도 이유가 있다. 쓸 돈이 있어 재미로 이어지고, 재미있게 살자는 철학이 퇴폐를 엄호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재미있게 살자면 돈이 있어야 한다.” 혹은 같은 말을 뒤집어 “돈이 있으면 재미있게 살 수 있다”는 빗나간 행복감에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 있는 것이다.

뉴욕타임즈는 얼마 전 활발해진 정신위생학계의 <돈과 행복>의 함수관계에 대한 연구들을 정리해서 보도했다. 칼 융 연구소장인 레비(John Levy)는 돈 푼이나 잡은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아풀루엔자(affluenza―풍요증)란 병명을 발표했다. 돈 있는 사람들이 흔히 갖는 증세인데 대강 이런 것들이다. 그들은 ①의욕이 약해져가고 어디에 헌신하기를 주저한다. ②부가 더할수록 점점 더 남을 의심하는 버릇이 생긴다. 그래서 진짜 친구는 삼지 못한다. ③지루함을 느낀다. 돈이 있어 많은 활동(직업, 사교, 놀이 등)을 하지만 정말 의미를 느껴 하는 것이 아니고 지루함을 감추려는 노력이다. ④땀이 덜 들어간 돈일수록(유산, 벼락부자) 죄책감과 열등감을 더 가지고 있다.

레비의 연구는 돈 있으면 행복해지리라는 상식을 뒤엎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불행한 결과는 돈을 단순히 풍요와 쾌락의 도구로 삼을 때 생기는 것이고 같은 돈이라고 고상한 목적에 연결하고 있을 때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다. 그린커(Grinker) 박사는 록펠러의 다섯 아들을 예로 들었는데 그들은 모두 뚜렷한 윤리관과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돈 많은 불행한 인간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린커 박사는 <돈과 정서>의 함수관계도 연구했는데 돈이 많아질수록 감정이 빈곤한 메마른 인간이 된다고 한다. 풍요를 구가하는 넉넉한 미국 가정의 문제성도 여기에 있다고 지적하고 그런 가정일수록 부모와 아이들의 감정이 멀어지고 있으며 아이들은 오히려 식모에게서 따뜻한 모성애를 다소 체험한다고 경고하였다.

믹스(Meeks) 교수는 “부잣집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남을 위하여 건설적인 일을 하는 것이 결국 자기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탄하는 연구보고를 하고 있다.

돈―재미―행복의 공식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정말 재미를 보려면 향락보다는 오히려 희생을 해보아야 한다. 쾌락은 임시적인 아편의 역할을 하지만 습관이 되면 파멸의 독약이 된다. 한국의 퇴폐풍조의 문제는 업소의 문제가 아니고 가치관의 문제이다.

흔히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큐로스는 쾌락주의자라고 불린다. 그래서 그를 먹고 마시고 즐기는 식충이나 주색가 정도로 오해하지만 에피큐로스에게 있어서 쾌락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여러 종류의 쾌락을 구별했는데 강렬하긴 하지만 짧은 쾌락, 덜 강렬하지만 오래 지속되는 쾌락과의 구별, 혹은 후에 고통을 주는 쾌락, 휴식의 감정을 주는 쾌락과의 구별 등이다.

에피큐로스가 쾌락설을 택하게 된 것은 데모크리토스의 물리학의 영향 때문이다. 그의 원자론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단단한 물질로서 작고 부서지지 않는 조각 즉 영원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이 존재한다면 그들도 역시 물질적인 존재여야 하지만 신은 모든 사물의 원천이거나 창조주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원자의 충돌과 확장에 의한 우연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에피큐로스가 만물의 기원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했고 쾌락 추구를 본질로 하는 인간 역시 사물의 하나로 간주했지만 그러나 정욕과 방종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그는 쾌락을 선의 척도라고 확신했지만, 쾌락이라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보지 않았다.

가령 음식의 경우처럼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욕망이 있는가 하면 성의 쾌락처럼 자연적이지만 필연적이 아닌 욕망도 있으며 또한 사치나 인기처럼 자연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아닌 욕망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는 쾌락이 곧 목적이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방탕한 자의 쾌락이 아니며 무지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상상되는 성의 쾌락도 아니다. 그것은 육체의 고통과 정신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는 육체의 쾌락을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러한 쾌락에 너무 관심을 두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불행과 고통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임을 밝히고자 한 것뿐이었다. 육체적인 쾌락은 결코 완전하게 만족되지 않고 계속 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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