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백년 미션스쿨, 여전히 찬란한 이름

▲ 배위량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13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숭실학당이 올해로 120주년을 맞았다. 숭실학당은 현재 숭실중고등학교와 숭실대학교로 성장했으며, 숭실의 이름 아래 1만4000여 명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지금도 숭실대의 상징인 백마상처럼 힘찬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복음으로 시대 극복하고 민족 인재 양성하다

균형잡힌 신앙지도자 육성 120년 역사 이어가
기독 엘리트 교육 비전 묵묵히 실천

숭실중·고등학교는 말씀으로 가득했다. 교문에서 교훈 ‘참과 사랑에 사는 사명인’이 아로새긴 비석을 거쳐 교정에 오르는 길의 나무마다 성경말씀과 숭실인의 다짐을 인쇄해서 걸어놓았다. ‘교실에 하나님의 영광 거하는 그런 학교가 되게 하소서. 열방에 하나님의 영광 비추는 그런 숭실이 되게 하소서.’ 숭실은 복음과 민족을 위한 사명을 120년 동안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 진리를 위해 봉사하는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숭실중고등학교 교사에 들어서면 먼저 ‘숭실의 역사’와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액자는 ‘先求神國與義’ 여섯 글자가 굳센 필치로 써 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서 숭실 교육의 지향점을 알 수 있다.

숭실은 매일 조회와 종례 시간에 경건회를 진행하고 있다. 간단하지만 찬양과 성경읽기와 기도로 진행하는 경건회는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학생들의 성품과 학급 분위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숭실중학교 교목실장 이중민 교사는 “경건회는 마치 어린 나무에 물과 거름을 주고 햇빛을 받게 하는 효과가 있다. 학생들의 성품이 온유하고 학급도 평화롭다. 이 때문에 다른 학교에 비해서 청소년 문제가 현저히 적다”고 말했다.

경건회뿐만 아니라 숭실은 매주 1회씩 주간예배를 드리고, 입학식과 졸업식 등은 물론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 절기마다 예배를 드리고 있다. 특히 절기예배 시간에는 예수님을 모르는 학생들을 위해 함께 간식을 나누기도 한다.

▲ 숭실대학교 재건에 큰 힘을 쏟은 고 한경직 목사 동상.

특별한 행사도 있다. 1학기에 학년별로 찬송경연대회를 개최하고, 2학기는 추수감사절에 맞춰 성경경시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절기예배와 각종 행사의 목적은 복음전파이다. 비기독교 학생들에게 교회에 대한 좋은 인식을 심어주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숭실중고등학교가 전적으로 복음 중심의 교육을 펼칠 수 있는 배경은 모든 교사들이 신앙인으로 헌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에 대한 철학은 다를지 몰라도 기독 교사로서 사명감을 갖고 학생들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중민 교목실장은 “교사들은 모두 ‘나는 기독 교사’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것이 120년 전에 세워진 학교지만 여전히 설립목적에 맞게 기독교 교육을 이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랑에 사는 사명인 양성

교명 숭실(崇實)은 ‘진실과 성실을 받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실은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염두한 것이다. 이는 숭실학당 설립자 배위량 선교사의 졸업사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 숭실중·고등학교 교정에 있는 말씀나무.

배위량 선교사는 1908년 졸업식에서 “학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학생들의 종교적이고 영적인 요소를 개발하여 민족 가운데 복음을 전파할 교회를 세우고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복음을 전파하고 민족을 위한 지도자 양성’한다는 목적에 따라, 숭실은 120년 역사 속에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또한 민족과 나라를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일도 쉬지 않았다. 숭실중고등학교는 장애인시설과 연계해 학생들이 봉사활동을 펼치도록 하고, 결핵환자 자원봉사와 농촌봉사활동 등을 펼쳐 왔다.

숭실고등학교 교목실장 윤재희 교사는 이런 봉사활동이 평양 숭실학당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 교목은 “해마다 학생들이 농촌봉사활동을 펼쳤다. 이 활동은 평양 숭실학원 시절에 농촌 지역으로 가서 여름성경학교를 열어주고 봉사활동을 하던 역사를 이어 온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농어촌 교회들에 주일학교가 사라지면서 농촌봉사활동은 중단됐지만, 필리핀 해외봉사활동 등으로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외에도 숭실중고등학교는 학생들을 균형잡힌 신앙인으로 육성하기 위해 관현악반 합창반 등을 운영하며 학부모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축구부는 평양 숭실학당 시절부터 유명했다. 일제 강점기 서울과 평양의 축구대표팀의 경기인 경평축구전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는데, 평양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대부분 숭실 출신이었다.

▲ 숭실고등학교 교사 현관에 있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 현판과 역사 인물들의 얼굴 속에서 복음적 교육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학력 역시 강북에서 상위권을 달리고 있다. 숭실고등학교는 강북에서 서울대와 카이스트 등 주요 대학에 합격생을 많이 배출하고, 4년제 대학 합격률이 80%에 이르고 있다. 이런 학업증진은 기독교사들이 정규수업 외에 온라인 교육시스템인 사이버스쿨까지 운영하며 노력한 결과이다.

시대를 극복하고 민족 위한 숭실로

숭실중고등학교는 다른 학교에 비해 기독학생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그러나 60% 정도의 학생들이 아직 복음을 모르고 있다. 숭실의 기독교사들은 과거에 비해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복음의 수용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중민 교목은 “예배보다 재미있는 것들이 넘쳐난다. 개인주의의 환경변화 역시 복음을 전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요즘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면, 주일예배에 출석하는 것만으로도 기특할 정도”라고 말했다. 윤재희 교목 역시 학생들의 인터넷 중독 등을 우려했다.

▲ 그리고 숭실 교육이념인 ‘참과 사랑에 사는 사명인’을 새긴 교비에서 민족을 향한 복음적 지도자 양성의 비전을 읽을 수 있다,

아울러 교사들은 학교와 함께 한국교회가 다음세대를 이해하고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요청했다. “청소년 교육은 당장 열매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미래를 위해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신앙의 든든한 뿌리를 내리는 데 목표를 두었으면 좋겠다.”

숭실학원은 숭실국제기독학교를 건립하는 비전2020을 수립했다. 이를 통해 기독교 엘리트 교육을 실시한다는 목표다. 재단은 다르지만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숭실대학교는 평양을 바라보며 통일의 비전을 품고 있다.

120년 역사를 이어온 숭실은 설립의 그 때처럼, 복음으로 시대를 극복하고 민족을 이끄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지금도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대표적 민족운동가 배출
차이석·조만식·윤동주 등 ‘숭실인’ 양성

1897년 10월 10일 미국 북장로교 소속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사진❶) 선교사가 숭실학당을 시작했다.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알려진 평양 신양리 26번지에 위치한 사택 사랑방에서 첫 학생은 13명이었다. 120년이 지난 현재 숭실학당은 숭실학원 소속의 숭실중고등학생 3000명과 숭실대학교 1만1000명으로 1000배 이상 커졌다.

120년의 역사만큼 업적과 인물도 많다. 중학 과정으로 시작한 숭실학당은 1900년 5년과정으로 발전하며 정식 중학교가 됐고, 1904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숭실중학교를 바탕으로 1906년 9월 한국 최초로 대학교육을 실시한 역사도 갖고 있다. 이후 숭실대학은 1912년 정식 대학인가까지 받았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는 을사늑약반대운동, 신민회105인사건, 3.1운동 등 항일민족운동을 끊임없이 펼친 숭실을 가만두지 않았다. 특히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2월 28일 숭실중학에서 인쇄해서 배포한 것은 유명하다.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김창준 박희도가 숭실 출신이었다. 신민회 지도자로 105인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비서장을 역임한 차이석(사진❷), 역시 신민회에서 활동하며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조직해 자주독립운동을 펼치고 오산학교 숭인학교 교장을 역임한 조만식 선생(사진❸) 등이 대표적인 숭실 출신이다. 차이석과 함께 숭실중학 1회 졸업생이었던 최광옥(국어학자) 노경오(교육가)도 빼놓을 수 없다.

결국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1915년 사립학교교칙을 제정해 성경과목을 가르치지 못하게 했다. 숭실중학은 이에 굴하지 않고 조선총독부의 고등보통학교 인가를 거부하고 ‘성경교육’을 택했다. 그러나 신앙의 마지막 보루를 요구하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숭실중학과 숭실대학은 1938년 폐교하고 말았다.

숭실은 암울한 시기를 지나고 있었지만, 말씀 안에서 민족을 위한 인재 양성의 목표만은 더욱 빛났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윤동주 시인(사진❹)이다. 윤동주 시인은 숭실중학이 폐교할 당시 재학생이었다. 윤동주는 민족저항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세계관이 기독교 신앙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윤동주 시인의 육촌동생인 윤형주 장로는 “당시 지식인들이 변절을 할 때, 동주 형은 신앙의 힘으로 조국의 해방을 믿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숭실 출신으로 논란이 된 인물도 있다.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사진❺)는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1940년대 유럽에서 친일행적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숭실고등학교는 안익태를 졸업생으로 밝히고 있으며, 숭실대는 안익태기념관도 건립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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