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행복의 날’이다. 아시아의 어느 국가는 삶의 가치를 경제가 아닌 행복지수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펴면서, 가난하지만 국민의 행복감은 높다고 한다. 이 나라의 가치추구를 무턱대고 적용하기에는 무리수가 있다. 다만 곱씹을 대목은 있어 보인다.

성장주의는 아직도 한국교회를 휘감고 있는 고질적 가치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성장주의는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교인수와 재정규모를 교회의 가치 척도로 삼는 것이다. 성장은 나쁜 것이 아니다. 생명의 복음은 반드시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장을 가치로 삼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성장의 잣대로 보면, 잘 되고 잘 풀리고 커지고 확장되는 것이 은혜요 옳은 신앙이라 여기게 된다. 결국 복음을 왜곡시킨다. 성장의 가치에 함몰되면 신앙생활에서 오는 복음의 진수와 복음의 본질이 가져다 주는 참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한창 노회가 진행 중이다. 최근 나름 목회에 집중하려 노력하는 목회자들을 만나면 심심찮게 듣는 말이 있다. 노회 때문에 힘들다는 것이다. 노회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노회를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 같다면서 말이다. 노회의 운영과 정치 때문에 개교회가 힘들어한다는 것은 분명 왜곡된 일이다.

총회는 어떤가. 교단 구성원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일련의 여론조사에서 절대다수가 교단을 불신한다고 응답한 것을 보면 교단으로부터 오는 만족감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능하다.

교회, 그리고 교회의 모임체인 노회와 총회. 이 모두가 복음 안에서 맺어진 믿음의 공동체이다. 세상의 어떠한 것도 줄 수 없는 유일무이한 복음으로부터 오는 행복을 누려야 할 공동체가 오히려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현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교회가 대안이며, 인생의 참 행복을 누리자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왜곡된 성장주의와 정치 논리로 빼앗겨 버린 공교회로부터 오는 행복지수를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에 던져 보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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