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산정현교회)

▲ 김관선 목사(산정현교회)

우리는 지금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들을 검증하며 누굴 뽑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 가지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좋은 대통령을 뽑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덜 나쁜 사람을 뽑을 것인가에 경쟁하듯 매달려 있는 것 같다.

거기에 더해 누가 내게 유리한 인물인가를 찾고 있는 듯하다. 당자자인 후보들은 국가의 미래를 제시하고, 또 우리가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비전들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은 이와는 거리가 멀어 보여 답답한 심정이다. 상대 후보의 허점과 약점들을 들춰내며 흠집 내기 위해 온 힘을 쏟아 붓는 형국이다.

거의 대부분의 민감한 이슈는 과거에 매여 있다. 물론 현재에 존재하는 그 사람은 과거의 흔적들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기에 누구든 과거의 행적을 짚어내야 검증이 가능하다. 그런 점을 인정하면서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이미 끝난 부분도 다시 들춰내서 재탕 삼탕 선거판에 단골 메뉴로 우려먹고 있다는 것이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교회와 또 교단은 어떤가. 우리도 역시 같은 일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제102회 총회를 앞두고 총회장을 비롯한 총회임원 그리고 총회총무 등을 선출하기 위한 움직임들이 벌써부터 활발하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하고 풀어야할 현안들도 많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거시적 안목으로 여러 문제들을 풀어내야 교단이 미래로 향해 전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단이 여전히 과거의 문제에 발목 잡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한국교회가 직면한 매우 심각한 문제들을 잘 알고 있다. 성장 둔화, 교회 이미지 실추, 젊은 기독인들의 좌절 등 우려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점을 모를 리 없는 우리들이 위기의식 속에 교회와 교단의 미래를 새롭게 설계하고,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현재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진단하고 그에 따른 솔루션을 제시하는 것이 우선일 텐데, 우리 교단은 헝클어진 과거의 문제에 매달려서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대선후보들이 상대의 과거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그것은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개인적 욕망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이를 바라보는 우리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몇몇 사람들 속에 자리 잡은 욕망으로 인하여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제 털어버릴 부분들을 과감하게 털어버리자. 세상 사람들도 도무지 풀지 못할 것 같은 문제도 정치적으로 타협하고 대안도 찾으면서 해결해 가고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정치도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과거의 문제에서 지루한 샅바 싸움에 골몰하는 것인지 안타깝다. 몇몇 인사들의 욕망의 충돌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과거를 깔끔하고 또 투명하게 매듭지어야 한다. 미래를 향해서 함께 손을 맞잡아야 한다. 이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헝클어진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능력이나,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을 의지가 없다면 그 해결자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이 맞다. 그리고 사심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착한 사람들이 해결해 가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지혜로운 길이라 믿는다.

욕망을 가진 자는 문제를 바르게 풀 수 없다. 옳고 그름도 판단하지 못한다. 사안에 따라 유불리만 따질 뿐이다. 도덕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못한 어설픈 욕망의 대결로 공동체를 자멸의 길로 이끌지 않아야 한다.

교단이나 교회는 모든 정성을 다해 돈과 시간과 몸을 드려 헌신한 성도들로 인해 유지되고 발전되고 성장된다. 그런 거룩하고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성도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사리사욕의 도구로 전락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내 안에 자리 잡은 욕망은 선한 해결책과 미래의 비전에 있어서 가장 큰 방해거리다. 따라서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끊을 수 없다면 차라리 해결자의 자리에서 손을 떼라. 그리고 자리 욕심 없이 공동체를 위한 선한 의지와 주님만 바라보며 헌신하는 착한 분들에게 그 일을 넘겨야 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착한 사람들이라 여겨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누가 봐도 깨끗하고 욕심 없는 분들은 그런 일에 발 담그고 싶어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는 역사에 대한 책임회피이자, 주님 앞에 당당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02회 총회가 또 다시 혼돈 속에 치러지지 않으려면 손을 떼야 할 사람들, 오래토록 그 일에 매달린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야 한다.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서라도 교단의 십자가를 질 좋은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주어야 한다. 그것이 교단을 위한 일이고, 교단의 미래를 준비하는 고귀한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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