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 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

칼뱅이 제네바에 철저하게 성경적인 교회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옛 질서의 미신에 익숙한 제네바의 사람들을 설득하고 인도하는 일에는 많은 도전과 저항이 있었다. 이러한 저항에 대해 칼뱅은 성경이 명백히 규정하고 있는 것(diaphora)과 성경이 명백히 밝히지 않고 임의로 할 수 있도록 남겨진 것(adiaphora)을 구분했다. 또 교회가 아직 미숙한 것을 헤아려 장차 성숙된 교회로 나아가기까지 인내를 가지고 교회를 인도하였다.

성찬과 권징과 같은 부분은 목숨을 걸고 지켰고, 누룩을 사용하지 않은 떡을 고집하는 것에는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1536년에서 1538년까지 칼뱅의 1차 체류기간에 가장 강력하게 부딪힌 것은 성찬의 횟수와 세례반의 사용, 그리고 성찬 시 무교병의 사용과 같은 것이었다. 칼뱅은 이런 문제에 대해 “성찬의 외형적인 집행에 대해서는 예컨대 신자들이 떡을 손에 쥘 것인가, 신자들끼리 나눌 것인가? 각자 받은 것을 먹을 것인가? 잔을 집사들에게 돌릴 것인가 아니면 다음 사람에게 줄 것인가? 떡에는 누룩을 넣을 것인가 아니면 넣지 않을 것인가? 포도주는 붉은 것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흰 것을 사용할 것인가? 하는 따위의 문제는 불필요한 것이며, 교회의 생각대로 어느 쪽을 채용해도 좋을 것이다”(Inst.,4.17.43)라고 하였다.

무엇보다 만연한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먼저 예배당의 문을 닫아 두었다. 오랜 습관을 따라 미사에 익숙한 신자들이 예배당 안에 들어와 미신적 행위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또한 산파들이 세례를 행하는 습관을 법령으로 금지하였다. 옛 질서 가운데 성사에 속하였던 결혼식은 예배 전 30분에 실시하였고, 성찬과 세례를 제외한 어떤 성사도 허락하지 않았다. 옛 탁발수도사들이 구걸하던 것을 막기 위해 모든 도시에서 구걸은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종합구빈원과 프랑스구호기금을 통해 구제가 이루어졌다. 술집은 예배시간에는 문을 닫아야 했고, 간음한 여자에게 모자를 쓰게 하는 관행을 금지하는 법령이 만들어졌다. 또한 고리대금업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41년 교회법령에 5%의 이자를 합법적인 것으로 명시하였다. 화승총 사격대회나, 예배당에서의 연극공연은 허락되었다.

한편 제네바에서는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먼 타지에서 온 사람은 반드시 추천서가 있어야 결혼할 수 있었고, 의사들 역시 추천서가 있어야 했다. 또 방종한 게임이나 돈내기 게임을 할 수 없었고 발각되면 돈은 몰수당했다. 또한 성찬에 1년 동안 참석하지 않으면 도시에서 추방되었다. 약혼한 사람들은 6주 이내에 결혼하지 않으면 치리회에 소환되었다.

칼뱅이 미신을 타파하는 과정에서 가장 거대한 저항에 부딪힌 것은 다름 아닌 세례명 분쟁이었다. 1546년 11월 22일 목사회 회의록을 보면 세례명 부여의 위법 행위에 대한 시당국의 법령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우리나라에서 한 때 유행했던 우상의 이름들-수에르(Suaire), 클로드(Claude), 마마(Mama)를 세례명으로 주는 것을 금지하는 바, 이는 미신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요, 또한 왕들을 호칭했던 이름들도 금지하는 바 이것도 악습이기 때문이다. 직분의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사명이 맡겨지고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티스트(Baptiste), 앙쥐(Ange), 에방그리스트(Evangeliste)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에게만 속한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디유 레 피스(Dieu le Fils), 엠마뉘엘(Emmanuel), 주에쥐(Jesus)같은 이름이다. 불합리한 것과 연관되고 조롱을 받을 수 있는 부적절한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투상(Toussaint), 크화(Croix), 디망쉬(Dimanche), 티펜(Typhaine), 노엘(Noel), 팡테코트(Pentecoste), 크헤티앙(Chretien)이다. 이중적인 이름이나 들어서 좋지 않은 고낭(Gonin), 메르메(Mermet), 세르메(Sermet)도 마찬가지이다. 티방(Tyvan)과 같은 퇴페적인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세례명 분쟁은 제네바의 기득권층의 정서를 자극하는 일이었다. 세트(Septh)나 발타자르(Balthasar), 클로드(Claude)는 제네바에서 익숙한 이름이면서 제네바 기득권층 가정의 관행적 이름이었기 때문에, 종교적 차원보다는 기존 제네바의 전통과 권력층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1546년 8월 12일에 치리회 위원의 부인인 클로드 부브레이(Claude Vouvrey)는 자신의 자녀에게 클로드(Claude)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목사가 ‘아브라함’이라고 세례명을 주자 분쟁이 되었다. 이렇게 세례명 거부는 1548년에서 1552년까지 계속되었다. 1548년 5월에 미하엘 콥은 자신의 자녀에게 직접 발타자르(Balthasar)라는 세례명을 지어주며 반항했다.

이와 같이 칼뱅의 제네바의 개혁은 때로는 격렬한 저항에 맞서야 했고, 때로는 교회가 성숙해지기까지 인내해야 했다. 분명한 것은 성경적인 교회를 건설하는 목표는 흔들린 적도, 타협한 적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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