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특별 기획] 다시 세우는 2017 한국교회 신앙고백 2- ③ 종교개혁의 키워드 ‘진리’:칼빈으로 루터 읽기

성경의 가르침 자기의 질문에 한정시킨 루터 … 칼빈은 성경이 묻고 성경이 답하게 하였다

1517년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95개조 반박문 게시를 기점으로 삼아 오는 10월 31일로 종교개혁 500주년이 된다. 종교개혁은 단지 종교의 개혁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교권(敎權)과 속권(俗權)이 엄밀하게 분리되지 않았던 중세시대의 종언을 고하고 교회와 국가의 황금률적 분할을 추구했던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일대 전기(轉機)를 마련했다.

루터의 ‘자기’ 개혁

루터가 비텐베르크(Wittenberg)성에 있는 한 교회의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건 것은 당시 횡횡했던 면죄부(免罪符)에 대한 신학적 문제점들을 낱낱이 적시하여 그것이 과연 성경적인지를 공개적으로 토론해보고자 해서였다. 그 발단은 정치적이지 않았고 그다지 교회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적 혹은 사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침잠했던 ‘죄와 구원의 문제’가 면죄부의 가액을 치르는 순간 모두 해결된다는 하니, 얼마나 큰 회의감과 허탈감이 몰려왔겠는가? 이 문제를 풀어보고자 어거스틴 수도회에 속한 수사가 되기도 했지만 그의 죄의식은 더욱 강렬하고 깊고 날카로워졌다. 엄격한 자기 절제와 고행과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지만 영적인 불안과 근심은 오히려 짙어만 갔다. ‘자기’ 연마의 숫돌을 갈아댈수록 날이 서기는커녕 ‘자기’만 마모되어갈 뿐이었다. 루터는 이를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만약 수도원 생활을 통해 천국에 이른 한 수사가 있었다고 친다면 그는 아마 나였을 수 있을 것이다. 수도원에서 나는 내 영혼의 구원과 내 몸의 건강을 모두 잃어버렸다.(Hans J. Hillerbrand, <The World of Reformation>, 13 재인용)

루터가 ‘자기’ 수행을 통하여 얻은 과실(果實)은 ‘자기’에 대한 절망(Anfechtung)뿐이었다. ‘자기’를 텍스트로 삼는 이상 그것은 영혼이든 몸이든 ‘자기’의 상실을 초래했을 뿐이다. ‘자기’의 공로와 가능성을 추구하면 할수록 그것은 ‘자기’ 파멸을 의미했다. 과연 누가 스스로 갚아서 자기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금전을 치르고 공로를 조금 산다고 한들 사망의 죄 값을 어떻게 환산할 수 있겠는가? 누가 ‘자기’를 도구로 삼아 ‘자기’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 루터는 죄와 구원의 문제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통해 로마가톨릭의 성상과 전통이 아닌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질문을 성경에서 찾는 주관성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칼빈은 자신이 아닌 ‘성경이 묻고 성경이 답하는’ 객관적 요소를 정립했다. 성경만이 모든 판단의 중심이었다.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자기념비에 조각한 칼빈 석상 역시 그의 말씀중심 사상을 잘 표현해 놓았다.

칼빈의 객관성: 유일한 텍스트 성경

루터보다 한 세대 늦게 태어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루터보다 더욱 다단 다변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석한 두뇌를 지니고 넘볼 수 없는 열심과 집중력을 발휘해서 당시 세간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로마 가톨릭 사제와 법학자와 기독교 인문주의자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20대 초반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후로 그는 오직 성경만을 텍스트로 삼아 그것을 해석하고 주석하고 설교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회심 후 불과 3~4년 후에 출판된 대작 <기독교 강요>의 초판은 가장 주목할 만한 그 초창기 열매였다. 우리는 칼빈의 생애를 다룸에 있어서 그가 목사이자 신학자이자 저술가이기 이전에 “성경의 교사(doctor Scripturae)”였던 점을 항시 잊지 말아야 한다.
칼빈과 루터는 모두 로마 가톨릭의 오류와 미망으로부터 벗어나 성경의 진리로 돌이키는 신학적 회심을 경험하였다. 그것은 거짓 신학으로부터 참 신학(theologia vera)에로의, 거짓 경건으로부터 참 경건(pietas vera)에로의, 거짓 교회로부터 참 교회(ecclesia vera)에로의 회심이었다. 그것은 거짓 텍스트로부터 참 텍스트에로의 회심-곧 성경에로의 회심(conversio ad Scripturam)이었다.
루터가 회심을 통하여 ‘자기’의 ‘죄와 구원의 문제’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얻게 되었다면, 칼빈은 회심을 통하여 비로소 그 문제에 대한 질문을 성경을 향하여 던지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루터는 성경의 가르침을 자기의 질문에 한정시켰다면, 칼빈은 성경이 묻고 성경이 답하게 했다. 이런 측면에서, 어느 학자의 다음 견해는 적실성이 있다.

칼빈의 “나”는 불가분리하게 그의 교리에 부착(付着)해 있다. 루터의 경우, 주관적 요소는 종종 어떤 진술에 나타난 객관성 요소를 변모시킨다. 정반대로 칼빈의 경우, 객관적 요소는 주관적 요소를 압도한다. 그러나 주관적 요소를 압도함으로써, 객관적 요소는 주관적 요소의 실체를 보존한다.(Alexandre Ganoczy, <The Young Calvin>, 242)

칼빈은 오직 ‘성경의 복음’만을 ‘성경적 복음’으로 여겼다. 성경을 떠나 성경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건한 독자(lector pius)는 먼저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성경 앞에 서야 한다. 누군가에게 말하기 전에 먼저 귀가 열려야 그 말이 분명해진다.(막 7:35) 참 신학자(theologus verus)는 먼저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단지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들, 확실한 것들, 유익한 것들”(<기독교 강요>, 1.14.4)을 가르칠 수 있다.

믿음은 들음으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루터의 회심은 ‘자기’로부터 성경에로의 회심이었다. 그것은 자질으로부터 고백으로의 전환, 수행으로부터 들음으로의 전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부터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에로의 전환을 의미하였다. 루터에게는 ‘자기’라는 주관적 요소가 성경이라는 객관적 요소를 압도하거나 제한하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지만, ‘자기’의 질문에 대한 답을 궁극적으로 성경에서 찾아내고자 한 그의 새로운 몸부림이 없었다면 500년 전의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혹자는 루터의 신학을 “성경적(biblical)”일 뿐만 아니라 “실존적(existential)”이고 “변증법적(dialectical)”이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후자에 방점을 찍는다.(Timothy George, <Theology of the Reformers>, 56-62) 하지만 우리는 다음 사실이 칼빈에게 뿐만 아니라 루터에게도 돌려져야 한다는 점을 숙고해야 한다.

종교개혁은 단순하나 고급스러우며, 사도적이고 성경적인 종교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종교는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종교개혁은 기독교를 그 본래적 순수함 가운데 회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초와 지지도 없이 수 세기 동안 붙들고 왔던 신앙과 삶을 제거하려는 시도이다.(M. Eugene Osterhaven, <The Spirit of the Reformed Tradition>, 19)

종교개혁은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만 신적 권위가 있으니 그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자 아무도 없다는 기치 하에 전개되었다. 말씀은 무오(無誤)하나 지상의 교회는 그렇지 않다. 교회 위에 말씀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 이 땅의 성도가 완전하지 않듯이 지상의 교회도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성도가 날마다 더 거룩해져 가야 하듯이,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지고 있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성도는 교회를 어머니로 두어야 한다. 다만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가르치고 선포할 때에만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다. 개인적인 자질이나 선행(善行)의 공로나 의가 없어도 오직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구령의 복음이 천년의 중세 암흑기를 뒤로하고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종교개혁은 새로운 말씀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말씀 그 자체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말씀을 들으니 믿는 자의 수가 더하고 모여서 예배드리고 흩어져서 전도하기를 힘쓰며 서로 유무상통하는 성도의 교제를 강조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행 1:8; 2:41-47; 5:42; 6:7) 이제 예배의 지향점이 ‘보는 예배(cultus visus)’로부터 ‘듣는 예배(cultus auditus)’로 바뀌게 되었다. 각국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고 신앙고백서와 신앙교육서가 속속 저술되었다. 성경주석이 앞 다투어 집필되었으며 설교집이 발간되어 봇물과 같이 쏟아져 나왔다. 많은 순교자가 속출했지만 죽음 앞에서도 그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롬 1:16)

종교개혁의 요체:오직 성경으로

●기고
문병호 교수
(총신 신대원)

“오직 기록된 성경으로!(sola Scriptura scripta)”라는 외침에 종교개혁의 요체가 들어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가시적(可視的)이고 유형적(有形的)인 교회를 두셔서 자신의 백성을 하나가 되게 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찬양과 영광을 받으신다. 지상(地上)의 교회는 천상(天上)의 교회를 바라보는 바, 그 본질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손에 잡히는 시설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온전한 신앙고백과 예배와 사역, 그리고 성도의 교제에 있다.
하나님은 기록된 자신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그 가운데 지금도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그 말씀을 지금도 이루신다. 종교개혁의 불변하는 의의와 가치가 여기에 있다. 루터는 그 시금석을 마련했던 것이며 칼빈은 그것으로 모든 신령한 것을 측량하고 제도(製圖)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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