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이 부끄럽기만 하다. 최근 분규가 생겨 송사에 휘말린 교회들이 자신들의 잘못은 반성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승소하려는 작태를 보이고 있어 교단의 위상을 손상시키고 있다. 특히 저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성취되지 않으면 교단을 탈퇴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하고 있어 이것이 더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K노회 문제나 J노회 문제들이 그 사례이다.

종교개혁은 교회와 신학의 갱신뿐 아니라 사회를 포함한 인간의 삶 전영역에 변화를 주는 광범위한 운동이었다. 루터는 정치권력에 대해 평행적 관계를 지녔지만, 칼빈은 여기에서 진일보하여 하나님 중심주의로 인간과 사회관 등 신학 전반에 개혁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칼빈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했을 때 그 주장은 우리 삶의 의미를 새롭게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이 세상 속에서 악과 불의와 맞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이 진정한 거룩임을 일깨워주었다. 위와 같은 K노회 문제나 J노회 문제들처럼 교단 탈퇴라는 악수를 두는 것은 지금껏 부정청탁이 먹혀들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런 사례들이 노회에서부터 생겨나기에 올바르지 못한 판결에 길들여진 저들은 올바른 법리 앞에서 재판국 판결에 불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동안 노회 재판국이나 총회 재판국 내에서 부정청탁을 받고 송사를 굽게 한 사례가 왕왕 있어 왔다. 이러한 불신은 교단 탈퇴라는 선례를 남겼고 이것이 이제는 일상화 되면서 오랫동안 몸담아 왔던 노회와 총회를 떠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오죽 부패했으면 금번 102회 총회부터 선관위와 재판국원들을 투표로 결정하자고 결의했겠는가?

중세 타락한 주교들을 연상케 하는 불의한 재물을 탐하는 인사들로 송사를 다루게 해서는 안된다. 교계에 성한 곳이 없다는 개탄의 소리가 무성하다. 그만큼 정의가 사라지고 구조적인 비리와 부조리가 만연되어 있는 곳이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계라는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나카노 고지(中野孝次)라는 사람이 쓴 <청빈의 사상>이 날개 돋친 듯 팔린 때가 있었다. 부총리도 장관도 모두 24평짜리 아파트에서 살만큼 검소한 사람들이 청빈한 삶을 상찬하는 책을 경쟁적으로 사서 읽었다는 이웃나라의 정서가 부럽기만 하다. 왜 우리나라 그리고 우리가 몸담은 교계가 이렇게 되었는가.

총대들에게 당부한다. 불의한 재물로 부정청탁을 하는 자들과 이러한 재물을 탐하는 자들이 발을 못 붙이는 건강한 총회를 만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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