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신 교수(숭실대 법인이사, 역사학)

▲ 박정신 교수(숭실대 법인이사, 역사학)

세상이 시끄럽다. 복잡한 남북관계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막말’까지 가세해 더 안개 속이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계란 파동까지 더해 우리의 생존과 생명권이 위기에 달려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며, ‘세상 나라’의 시민이기 이전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인은 현존질서의 어느 한쪽에 치우친 생각으로 살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뜻과 지향에 맞게 ‘초월’에 잇대어 삶을 꾸려야 한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 살던 예수 따르미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끄러운 세상’과 그런 세상의 문제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향해, 세상의 일들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상의 일들 가운데 ‘위안부 문제’가 들어선다. 이 문제는 단순히 한·일 간 외교 문제로 묶어둘 수 없다.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애국심의 문제로도 치부할 수 없다. 보다 깊은 수준에서 논의하는 이들은 인권이니 양심이니 하는 인류 보편의 가치에 잇대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위안부 문제’를 ‘회개’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어느 개인이나 어느 민족 혹은 어느 국가라도 잘못된 판단, 잘못된 행동을 저지를 수 있다. 그리고 잘못인 줄 알았으면 뉘우치는 것이 정당한 순서다. 그래야 개인과 개인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 뒤틀린 관계가 회복된다. 이 뉘우침을 기독교식으로 표현하면 ‘회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질서의 뒤틀림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비추어 생각한다. 나아가 우리가 회개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신다고 믿는다.

그런데 일본은 회개하지 않는다. 20세기 초에 자행된 잔인한 식민통치에 대한 죄악과 전쟁동원기에 자행된 야만적인 위안부 문제 등 과거 일본제국이 저지른 잘못된 판단, 잘못된 행동에 대해 뉘우치지 않는다. 아니 거칠게 말하면 그들은 아예 회개할 수 없는 민족처럼 보인다. ‘초월’에 잇대어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성찰하는 종교·문화적 장치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천황 숭배에 터한 국가주의가 ‘초월’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기에, 그 천황제 국가주의에 기대어 자신들의 판단과 행동을 읽으면 얼마든지 과거사가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장한다. 위안부 문제를 외교의 문제, 애국심의 문제, 인류 보편 가치의 문제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상당히 오랫동안 그런 방식으로 접근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문제는 종교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사에 대해 회개할 줄 모르는 일본의 뻔뻔함을 일깨우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고 인식해야 한다.

이른바 ‘전도’ 혹은 ‘선교’를 위해 한국교회는 그동안 무수히 일본에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교인 수나 교회 숫자를 늘리는 것이 ‘전도’ 혹은 ‘선교’의 전부가 아니다. 그들의 마음바탕에 ‘회개’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한다. 천황이나 국가주의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일본사람들을 지배하는 그 종교·문화적 구조를 깨뜨리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일본이 진실로 ‘회개’하고, 일본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시각은 여기까지 나아간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정치문제, 사회문제, 윤리문제가 아니라 종교문제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당연히 떠맡아야 하는 전도의 문제요, 선교의 문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 21세기 이 땅의 그리스도인은 이 역사적 부르심에 “예”로 대답할 책임이 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