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지자(裂之者)도 가(可)요 습지자(拾之者)도 가(可)’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찢은 사람도 옳고 줍는 사람도 옳다는 말로,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은 1636년 인조 14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였다. 이 말을 양시론이라 하는데 연원을 찾으면 1623년 인조반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이 비밀리에 추진해 온 실리외교에 대한 전환으로 수없는 난관을 겪어야 했다.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광해군의 향금(向金)정책, 즉 청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지지할 수 없었다.

당시 반정의 주된 세력들인 서인들과 중신들은 향명배금(向明排金)이었다. 1637년 1월 18일 청나라 군대에 포위된 남한산성은 청나라 진영에 화친을 청하는 국서를 보낸다. 남한산성이 포위된 지 23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 국서를 쓴 사람이 최명길이었다. 이 때 김상헌은 이 국서를 찢어 팽기치면서 최명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지천(최명길의 호) 자네의 선대부께서는 사우들 사이에서 지조 있는 선비로 추앙을 받으셨는데 자넨 어찌 이런 글을 쓴단 말인가 선대부께서 통곡을 하고 계실 것 일세.” 이 때 최명길이 한 말이 ‘열지가도 가요 습지자도가 즉 찢은 사람도 맞고 도로 주운자도 맞다’는 말이었다.

지금 우리는 이 두 대립을 놓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있기에 최명길의 화친론이 옳았다고 보지만, 당시 사정으로는 척화론이 우위에 있었기에 메국노로 취급되는 위험한 일이었다. 역사는 최명길이 보여준 공직자로서의 소신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만일 최명길이 자신의 소신을 꺾고 당시의 시세인 사대주의의 척화론에 무릎을 꿇었다면 아마도 민초들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함께 이 강토는 더 큰 유린을 당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화친론과 척화론의 대립 속에서 맞은 참화가 1636년 인조 14년의 병자호란이었다. 만일 당시 화친론이 조정의 공론이었다면 아마도 병자호란으로 인한 참화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이 꼭 한 가지 일 수 만은 없다. 김상헌의 명분론도 필요할 때가 있고 그 어려웠던 시절 실리론을 펴 나라를 구할 수 있었던 최명길의 용기는 더 귀한 것이었다. 명분과 실리의 다툼으로 생겨난 양시론이 이분법적 사고로 분쟁과 다툼이 만연된 이 사회의 문제 해결에 열쇠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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