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대 교회음악과 교수>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부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절정이며 완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인간 구원의 길이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부활을 특별히 노래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 2:11)라고 노래했다. 그리고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바흐(Johann Sebastian Bach)는 그의 칸타타 <Christ lag in Todesbanden>(BWV 4) 2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속박에 놓이셨으니 우리의 죄를 위해 주신 바 되었도다. 그는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에게 감사하며 할렐루야를 노래하리로다. 할렐루야!”

사실 부활이 없다면, 교회음악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부활은 교회음악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한 마디로 교회음악은 ‘부활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활의 노래로서 교회음악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는가?

우선 교회음악은 생명을 담고 있는 음악이다. 영국의 시인 허버트(George Herbert)의 표현에 따르면, 이 생명은 “such a life as killeth death(죽음까지도 죽이는 그러한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 교회음악은 그러한 생명을 노래한다.

이 생명의 노래가 진솔하게 울려 퍼질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죽음과 같은 어두움과 고민을 몰아내고 평안과 위로를 준다. 낙심하고 절망한 영혼을 일으켜 세우고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오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도전을 주는 것이다. 교회음악이 소중한 이유는 그처럼 부활의 생명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교회음악은 한계를 넘어서는 음악이다. 그것은 시공간의 제한뿐만 아니라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한계도 넘어선다. 교회음악은 ‘오늘 이 세상’에 속한 것뿐만 아니라 ‘영원한 저 세상’까지 다룬다.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시면 영광 중에 나아가리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 쓰고서 주와 함께 길이 살리” 교회음악은 이렇게 이 땅에서 저 초월적인 세계를 바라보며, 그리고 죽음 너머 저 영원한 삶을 기대하며 부르는 노래다.

이러한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현세의 삶이 어떠하든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괴롬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 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이 찬송 가사처럼 빛나고 높은 그 곳을 바라보며 날마다 싸우며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부활은 ‘죽음까지도 죽이는 그러한 생명’으로 죽음의 속박을 깨뜨리고 영생, 즉 천국의 문을 열어 놓았다. 교회음악은 그러한 부활의 노래다. 부활의 생명력이 없거나, 천국의 소망이 결여된 교회음악은 진정한 교회음악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겉모양만 세련되고 아름다운 음악보다 부활의 생명력과 소망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울리는 노래가 더 많이 울려 퍼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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