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개혁사상 부흥운동 인사이트 (insight) 왜 우리에게는 개혁사상이 필요한가 - ②종교개혁, 모더니즘에 답하다

인간과 세상 이해하는 보편적 실재로서 창조주 하나님 강조, ‘인간성 파괴’ 역설적 결과 부른 모더니즘 극복

▲ 라영환 교수·총신대학교 조직신학·개혁사상부흥운동위원회 전문위원

모더니즘의 사상적 토대가 ‘르네상스-계몽주의’라고 하는 사실은, 18세기 이후로 서구에서 종교개혁의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 계몽주의는 여러모로 종교개혁과 대립되는 사상이었다. 종교개혁가들, 특별히 칼빈이 주장하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라는 사상은 그들이 추구하는 인간상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계몽주의자들이 갖던 ‘인간의 자율성’ ‘역사에 대한 낙관론적인 이해’ ‘진보에 대한 신념’은 종교개혁자들의 주장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인간은 비록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세 후기부터 ‘칭의(Justification)’의 개념에 혼동이 오기 시작했다. 칭의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교리는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르네상스운동의 등장과 함께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칭의론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인간 개인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개인의 주체성에 대한 이러한 당시의 관심을 반영하여 바울과 어거스틴의 글들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고조되었다. “구원받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중세교회는 분명한 신학적인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 일부는 구원이란 인간의 선한 행위들을 통해서 획득된다고 생각하였고, 다른 일부는 교회 혹은 사제에게 부과된 속죄의 권위로 획득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문제에 대한 중세교회의 모호한 입장은 후에 면죄부(Indulgence)에서 보듯이 인간의 죄가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데까지 발전되게 하였다.

종교개혁의 단초를 열었던 마틴 루터 역시 초기에는 중세의 모호한 입장과 르네상스의 자율적인 인간관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계약(pactum)을 맺으셨으며, 이 계약에 의하여 하나님은 어떤 최소한의 전제 조건들(quod in se est)을 만족시키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고 믿었다. 즉, 칭의 문제에 있어서 죄인이 주도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은혜에 비해 인간의 노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노력을 요구하시고 그에 상응하는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에 기록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말씀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며 불의한 죄인들을 처벌하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수동적인 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후로 그는 ‘칭의’의 전제가 인간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된다.

칼빈은 이러한 루터의 칭의론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여서 선을 알 수도, 행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칼빈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이 있는데, 하나님을 알 때에 인간은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주장은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르네상스-계몽주의의 인간상과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칼빈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 완전하게 설 수 있다는 르네상스-계몽주의의 인간이해와 달리 인간은 하나님과 절대 의존관계에 있으며, 하나님을 알아야 자신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은 인식론에 있어서 모더니즘이 던졌던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인간의 이성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 자신과 이 세상, 나아가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칼빈은 인식에 있어서 이성의 능동적인 역할을 강조한 모더니즘과 달리, 수동적인 역할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또한 인간의 의지는 타락했지만 지성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보았던 아퀴나스와 달리 인간의 지성 역시 타락했고, 인간의 이성만을 기초로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인간의 지성이 그 영역 속에서 무한한 존재인 것처럼 활동한다는 인간 이성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식이 이성의 주관적이며 창조적인 행동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진리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 이성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만이 진리 판단에 있어서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과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최종적인 해답도 오직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간 이성의 인식에 있어서 수동성에 대한 강조는 모더니즘의 이해와 상반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칼빈이 인간 이성의 수동성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인가?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모더니즘의 토대가 되는 르네상스-계몽주의는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이해 그리고 진보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자율성을 주장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원죄 혹은 인간의 부패성이라고 하는 개념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칸트의 경우에서 보듯이 모더니즘의 이상은 스스로 도덕적인 완전함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칼빈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다 부패되었고 스스로 완전함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

종교개혁과 모더니즘은 각각 중세의 세계관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인간을 자율적 존재로 보았던 르네상스-계몽주의와 달리 인간은 스스로 설 수 있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타율적인 존재라고 보았다. 르네상스-계몽주의는 자율적인 인간에 집중했지만, 칼빈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무한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었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세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가 상호교환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서 세계를 이해하려는 모더니즘의 시도에 대해서 칼빈은 이러한 시도들이 인간의 현실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모더니즘의 인식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모더니즘은 그 사상적인 출발점을 그리스의 문화에서 찾았다. 그리스 문화의 특징은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합리성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고 주장한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의 말은 이 시대의 가치기준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신을 인간과 유사한 존재로 보았던 그리스인들에게 신들은 인간의 절대 기준으로 삼을 정도로 위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이 자신들을 만든 인간사회에 의지하였고, 그 사회가 붕괴되었을 때에 신들 역시 몰락하였다. 이러한 신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인들로 하여금 삶의 준거점으로서의 인간을 내세우게 하였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과 같이 르네상스-계몽주의는 그리스문화에 내재되어 있던 인간에 대한 강조와 합리성을 그 사상적인 토대로 삼았다. 모더니즘의 주창자들은 인간에 대한 강조와 인간의 이성 혹은 합리성에 대한 낙관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빵떼옹에서 볼 수 있듯이 신이 없어도 스스로 완전한 삶을 구축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의 자율성을 토대로 출발한 모더니즘은 결국 인간성 파괴라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소외와 파괴 그리고 상대주의라는 문제들은 개별적 개체로서의 인간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칼빈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없이 스스로 서려고 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가들, 특별히 칼빈은 인간 지성이 그 영역 속에서 모든 지식을 갖추고 무한한 존재인양 활동한다는 인간의 자율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만이 인간과 세상을 판단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칼빈은 인간이 자신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던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이성만을 가지고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충분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다 부패되었기 때문이었다. 모더니즘이 말기에 도달하면서 보였던 인간소외현상, 그리고 삶의 파편화는 칼빈이 이미 인식한 바와 같이 부패한 본성을 추구한 필연적인 결과이다.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고 보는 칼빈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모더니즘의 말기적인 현상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모더니즘이 한계에 도달한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존재론적 상관관계에 있는 인간을 역설했던 종교개혁의 인간관의 가치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보편적인 가치로서 개인에 대한 강조로 출발했던 모더니즘이 극단적인 상대주의에 빠진 이 시점 속에서,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보편적 실재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했던 종교개혁가들의 외침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인간은 모더니즘이 그 출발선상에서 믿었던 것과 같이 자율적인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더이상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에서 보여주고자 하였던 확신에 찬 눈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불안 혹은 절망이라는 병에 빠진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하나님뿐이시다. 개혁가들은 인간 안에 내재된 의가 아닌 전가된 의만이 인간이 직면한 죄와 소외의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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