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국교회의 보배, 순교자들-①총회역사위 연구학술세미나 발표(요약)

‘누가 순교자인가?’라는 문제에서부터 ‘우리가 찾아야 할 순교자들은 어디에 있는가?’와 ‘순교신앙을 어떻게 계승할까?’라는 문제들은 한국교회와 총회의 역사를 다루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이슈들이다. 5월 24일 총회회관에서 열린 총회역사위원회(위원장:김정훈 목사) 주최 제2차 연구학술세미나에서는 이 문제들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졌다. 특히 이날 세미나에서는 한센인 신앙공동체를 이끈 소록도교회의 김정복 목사, 77인 순교자를 배출한 염산교회의 김방호 목사, 해방 후 북한 땅에서 숨진 한덕교 목사,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대명사로 널리 알려진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 등 대표적 한국교회 순교자들의 면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앞에서 제기한 문제들의 해법을 모색했다. 본 지면에서는 이날 소개된 발표내용들의 핵심적인 대목을 요약하는 동시에, 증경총회장 장차남 목사의 개회설교의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다. <편집자 주>

■순교자 김정복 목사의 삶과 신앙
김남식 목사(한국장로교회사학회 회장)

해방될 당시 소록도교회는 목사가 없었다. 1946년에 들어서서 소록도교회의 재건 논의가 활기를 띠었는데, 교회 지도자들은 소록도에서 가까운 고흥읍교회에서 시무하는 김정복 목사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김정복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나의 마지막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자.’ 이것이 김정복의 기도 응답이었다. 김 목사는 1946년 4월부터 소록도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인도하고 한센병 환우들의 신앙을 지도하였다. 그러다가 고흥읍교회를 사임하고 소록도교회를 전담하여 시무하게 되었다.

소록도 환우들은 병들고 가난하였다. 교인들 가운데에는 심방온 목사에게 하소연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목사님, 아미다마(알사탕) 하나 먹어 보면 원이 없겠습니다.” 어린 아이 같은 소리를 하면 그 다음에 들릴 때 김정복 목사의 주머니에서는 알사탕이 나왔다. 그는 자신의 사례금으로 사탕이나 비누 등 교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사다 주었다. 사랑의 목회였다.

북한군이 소록도까지 들어온 것은 1950년 8월 5일이었다. 김정복 목사는 ‘인민의 적이며 미 제국주의자의 앞잡이’로 몰려서 모든 행동에 제약을 받았다. 김 목사는 신생리 마을 뒷편 바위인 ‘굴날뿌리 동굴’에 혼자 들어가서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비극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1950년 8월 28일이었다.

김정복 목사가 굴날뿌리 동굴에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원생 청년들이 이 사실을 밀고하였다. 공산군에게 체포된 노 목사는 고흥경찰서로 끌려갔고, 9월 30일 수십 발의 총소리가 고흥 뒷산의 새벽을 깨웠다. 이 땅의 나이는 69세였다. 그는 앉은 자세로 기도하다가 이마에 총을 맞고 이 세상을 떠나 눈물과 아픔이 없는 곳으로 갔다.

■김방호 목사의 생애와 순교
김효시 교수(광신대)

1950년 3월 10일 김방호 목사는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염산교회에 부임하였다. 그의 전임자 원창권 목사가 공산 좌익의 위협 속에서 사역하다가 사임했다는 소문에 아무도 부임하려 하지 않았던 어촌의 조그마한 교회였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되는 공산주의 사상에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평양신학교에서 미국 남장로교회의 칼빈주의 보수신학과 경건을 전수받았고, 한영서원에서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교육하며 항일운동에 앞장선 경험이 있었다.

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7월 23일 북한군이 염산교회에도 들이 닥쳤다. 주일 밤 예배 시작 종을 치러 갔던 사모가 종을 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북한군은 사택까지 빼앗아 김 목사 가족들을 길거리로 내 몰았다.

김방호 목사 가족이 피신해 있던 어느 날 김동근 장로와 김형호 집사 부자가 와서 목선을 준비했으니 피난가시도록 간청하였으나 김 목사는 이 어려운 때에 성도들이 다 흩어져 있고 교회의 문이 닫혔는데 나만 살겠다고 떠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1950년 10월 27일 김 목사 가족이 기거하고 있던 장병태 성도의 집에 공산군이 밀어닥쳤다. 김 목사의 모든 가족을 마당에 모아놓고 장작으로 쳐 이들을 학살하였다. 김방호 목사, 김화순 사모, 아들 현, 정, 전, 완 그리고 손자녀 선웅, 연경 등 8명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사상적, 신앙적 투쟁이 극심한 지역에 위험을 무릅쓰고 주님의 교회와 흩어진 양떼를 위하여 고난을 자초한 그의 용기와 희생정신은 끝내 순교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님을 따르는 길이 어떠한 길인지를 보여 주었다. 투철한 반공정신과 민족애 그리고 철저한 신앙으로 무장하여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염산교회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낸 그는 참 목회자였다.

■한덕교 목사의 생애와 신앙
장영학 관장(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

한덕교 목사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공산당에 의해 순교 당한 순교자이다. 우리 총회 안주노회의 역대노회장이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 은신하는 중 일제 형사들에게 발각되어 도망하다가 부상을 당하여 체포되었다. 치료 중 강제 신사참배를 하게 됐으며 후에 이것마저도 크게 뉘우치고 통곡하였다.

한 목사는 해방이 되자 안주동교회 안주중앙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북한교회 재건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이북5도연합회의 임원들과 함께 주일선거반대운동을 펼치며 김일성과 소련 군부에 항의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평양신학교 운영이사로 교장인 이성휘 목사를 도와 학생들을 가르치고 운영하는 일에 참여했다.

북한 정권은 1946년 소위 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한덕교 목사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가족들을 남쪽으로 보냈지만, 정작 본인은 교회와 성도들을 버리고 월남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으로 생각해 북에 남았다.

아내 이정숙 사모와 마지막 이별을 하면서 한 목사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여 지은 시 ‘영문밖에 길’을 전해주었다. ‘서쪽 하늘 붉은 노을’이라는 제목으로 2007년 발행된 새 찬송가 제158장의 작사가는 주기철 목사로 알려졌으나, 이정숙 사모가 월남 후 안용준 목사가 운영하던 한국기독교순교자유족회에 제출한 친필 메모는 한덕교 목사가 실제 저자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현재 이 자료는 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한 목사는 1950년 1월 2일 공산당의 소환 명령을 받고서, 교인들과 마지막이 될 것을 예견하고 순교의 각오로 공산당에 끌려갔다. 오지 탄광에서 노동을 하면서 고생하다가 6·25 전쟁 중이던 10월 15일경 공산군에 의해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종교개혁 5가지 솔라의 관점에서 본 손양원 목사의 신앙과 신학연구
신종철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

이 늘 중심축이 되었다. 그의 목적은 기독교의 중심 진리의 요체인 성경에 대한 바른 신학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학과 신앙은 신사참배 거부의 원동력이 되었다. ‘성경으로 시작하여 성경으로 마치고 싶다’는 손양원의 고백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주창했던 종교개혁자 칼빈의 고백이었다,

또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오직 은혜만으로’(Sola Gratia)의 진리를 깨달았던 손양원은 자신의 삶의 현장 속에서 이를 행동으로 표현했다. 1948년 10월 19일 발발한 여순 사건으로 인해 그의 아들 동인, 동신 형제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이때 손양원은 두 아들을 죽인 가해자를 용서하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기독교 구원교리의 핵심인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는 1947년 3월 9일 주일 오전예배에서 ‘예수를 잘 믿자’라는 제목으로 행한 손양원의 설교를 통해, ‘오직 그리스도만으로’(Solus Christus)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즉 대속적 자기희생을 실천한 그의 모습을 통해 잘 나타난다. 종교개혁의 마지막 표어인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나이다’(Soli Deo Gloria)는 사랑하는 아들들의 죽음 앞에서 ‘아홉 가지 감사’라는 제목의 기도문으로 표현된다.

손양원은 ‘종교개혁 5가지 솔라’가 무엇이었는가를 삶속에서 보여주었던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다. 그는 이러한 사상에 근거하여 바른 신학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신앙인의 참모습이 무엇인가를 늘 고민하면서 몸부림쳤던 한국의 종교개혁자였다. 이러한 모델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오늘의 한국교회에 값진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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