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좌주와 문생은 고려 귀족사회의 대표적 키워드다. 좌주는 과거시험문제를 출제하고 관리하는 ‘지공거’와 ‘동지공거’를 두는 고시관 제도이다.

고시관의 주관으로 시행된 과거에서 합격한 사람을 문생이라 했다. 문생은 좌주를 ‘은문’이라 부르면서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이는 자신들을 선발해 준 감독관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좌주 문생관계는 공공연한 의례 풍속으로 발전했다. 좌주와 문생관계는 고려 문치사회의 큰 세력으로 나타났다.

좌주와 문생관계가 확대되자 이재현의 장인인 권부라는 사람은 아예 좌주와 문생의 이름을 모아 <계원록>을 만들었다. 여기는 부·자·손 3대가 고시관을 역임한 경우와 좌주가 살아있을 때 그의 문생이 또 다시 좌주가 된 인물들을 모아서 기록한 것으로 이는 고려 명예의 전당의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좌주는 문생 중 뛰어난 자질을 보인 인물을 사위로 삼았다. 때로는 문생들에게 정치적 결단을 따르게 하여 파당을 만들기도 하였다.

결국 이 일은 고려 문치사회의 귀족화 및 정치 세력화로 이어져 왕권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좌주들이 유능한 급제자를 배출해 냄으로써 고려의 문풍은 크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좌주와 문생 그리고 동년들의 정치 사회적 유대와 결속은 혼인 등으로 연결되면서 정치 세력화 되어 고려관료 사회의 급속한 몰락을 가져왔다. 이들은 강력한 왕권을 지나치게 견제했고 한편으로는 강력한 왕권에 대한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공인왕의 개혁정책에 중용된 신돈은 그 폐해를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유자는 좌주와 문생이라 칭하고 중외(中外)에 늘어서서 서로 간청하여 그 하고자 하는 바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와 달리 이 제도가 폐지되고 왕이 최고의 지공거 시험의 당락을 결정짓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