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대담한 낙천주의자] ②부정과 탐욕의 세상에서 당신은?

둘째 마당: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전 3:16~5:7)

1. 도전

해 아래 세상에서는 정의로운 평가를 받기가 쉽지 않다(3:16~22). 그래서 수많은 인간들이 “억울하다!”고 아우성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 인생을 사는 신자는 하나님께서 지금 이 상황을 정의롭게 평가하고 계심을 이제 믿을 수 있다(3:17). 죽음이 궁극적인 정의의 심판이지만(3:18~20) 그 후에 더욱 완전한 평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임을 안다(3:21).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해 아래서의 억울한 사건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몫으로 받아 승화시킬 수 있다(3:22상).

참으로 아름다운 몫 아닌가(16:5~6).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도 얼마든지 희망을 걸어도 좋지 않은가! 죽음 뒤에 있을 이 완전히 정의롭고 영원한 평가를 직접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리 하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3:22하). 이 영원하고도 완전한 심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흔히 정의가 부정되곤 한다.

정의가 서지 않으면 학대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4:1~3). 완력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등의 폭력이 자행될지라도 정의로운 평가와 심판이 엄히 집행된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약자의 눈물을 도무지 닦아 줄 길이 없다(4:1). 그런데 해 아래 세상을 보면 이 문제를 만족할 정도로 해결한 시대는 없어 보인다. 그런 사회에서는 삶보다 죽음이 동경 받고, 죽음보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음이 더 동경 받는다(4:2~3).

사람의 타락한 본성은 타인의 성취를 폄하하는 쪽으로 기운다(4:4~6). 그래서 현세에서 흔히 사람들의 성취는 칭찬보다는 시기를 받는다(4:4). 그러나 시기하는 사람은 미련하다. 왜냐하면 분노에 사로잡혀 팔짱을 끼고 시샘과 미움으로 이를 갈아 봐야, 결국 갉아 먹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기 때문이다(4:5). 과연 누가 진정으로 자기 생의 분복들을 감사하고 평온할 수 있겠는가(4:6).

이처럼 부정의, 학대 그리고 시기가 마구 뒤섞인 세상에서 사람들은 서로 고립된 섬이다. 외로움의 문제다(4:7~16). 이 외로움은 홀로 있더라도 그 자체를 즐길만한 것이 아니다. 문학적 표현인 고독이 아니다. 이것은 홀로 있으나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몸서리치는 상태를 가리킨다. 비록 혈육이 있더라도 탐욕에 사로잡혀 시기하고 증오할 뿐이라면 없는 것과 다름없어 외로울 뿐이다(4:8. 5:14, 6:3 참고). 사람들은 노회(老獪)한 유력자라고 존중해 주지 않고, 유능한 소장(少壯)이라고 존중해 주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거의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많이 가진 타인을 밀어낸다(4:13~16). 아, 그러니 세 겹 줄 동무를 가진 사람들은 얼마나 받은 은혜가 많은 행복자인가(4:9~12).

2. 반전

이 많은 고난들을 피하지 못하고 맞닥뜨리면, 경건한 신자라도 혼란과 낙망에 빠질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라면 늘 하나님의 역사(役事)의 아름다움이라는 선언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5:1~7). 이것이 전도서가 천명하는 하나님 경외의 지혜다.(5:7)

이 지혜를 놓치는 사람은 신자일지라도 우매하기 이를 데 없다(5:1 중). 비록 하나님을 믿을지라도 이 지혜를 놓친 채 인생을 산다면 그의 신앙이라는 것이, 그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피곤하며 절망적이겠는가! 그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하나님의 처우로 인해 주님을 원망하거나 불신앙하는 심리와 언사를 쏟아놓을 것이다. 비록 윤리적 악이 아닐지라도, 신앙 안에 있으나 신앙하지 못할 수 있다는 이 불안한 심리보다 더한 악이 무엇이겠는가(5:1하~2상).

눈앞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걱정에 사로잡혀 온갖 망상에 괴롭힘 당한 끝에 불신앙적 언사를 쏟아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 매달리느라 그토록 무진 애를 썼건만 세상의 모든 부조리한 공격을 맨 몸으로 고스란히 다 받아내게 하시는 이 하나님의 처사 앞에서 어찌 “서원하고 경외하는 삶이 다 부질없구나. 이 길을 선택한 것이, 어쩌면 실수일지 모르겠다”는 신음이 새나오는 게 납득된다.(5:1-6)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그 가슴에 주신 사람에게 지금 여기의 모든 사건들을 가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해 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 그러므로 이 믿음을 가지고 현실을 살아가는 신자는 하나님 경외의 삶, 즉 하나님을 드높이 존중하면서도 이 삼위 하나님을 마음껏 즐거워하고, 또 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현실을 마음껏 즐거워하는 경외의 삶을 살 수 있다. 이 말씀에 귀를 기울임이 옳다. 꿈 같이 헛된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되는 대로 함부로 입을 열기 전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는 것이 옳다.

 

셋째 마당: 탐욕, 밑 없는 심연 (5:8~5:20)

1. 도전

눈을 돌려 세상을 보면 거기엔 학대와 부정의가 있다.(5:8상) 물론 우리는 이것이 인간 사이의 암투와 불의가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임을 안다.(5:8하~9) 그렇더라도 해 아래 세상에서 학대와 부정의는 끊이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시기와 고립이 따를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연원이 무엇인가? 탐욕이다.(5:10~17) 끝없는 허기(5:10), 결국은 혼자 다 가질 수 없음에서 오는 불만족(5:11), 어떻게든 더 크게 불려야 만족하겠다는 욕망(5:12~13), 그리고 결국 빈손의 죽음으로 인생을 끝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5:14~16), 이 사실들은 그 자체로 근심과 질병과 분노라는 어두움이다.(5:17)

2. 반전

그러나 ‘하나님 경외’라는 지혜를 지닌 신자는 희망에 찬 답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기 앞의 생이 충분히 아름답고 선한 전체 생애의 부분이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 현실 속에서도 탐욕에 뒤엉키거나 불만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몫의 수고 안에서 얼마든지 낙(즐거움)을 누린다.(5:18. 3:1~15 참고)

따라서 그는 얼마만큼의 분량이든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선물이요, 즐겁게 받아 누릴만한 선물임을 이미 알고 있다.(5:19)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셨으며 또 현재의 생을 영원에 잇대어 아름답게 완성해 가고 계신다는 정답을 가지고, 여기에서 오는 기쁨으로 무장된 신자는 더 이상 자기에게 배당된 현실의 몫을 하염없는 불만과 불신앙으로 해석하느라 부심하지 않는다.(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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