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서 목사(양지평안교회‧한국정신분석학회 전 회장)

▲ 박종서 목사(양지평안교회‧한국정신분석학회 전 회장)

아메리카 대륙 어디엔가 ‘금가루를 몸에 바르고 사는 사람들’(스페인어로 ‘엘도라도’)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스페인 탐험대는 이 ‘엘도라도’를 찾아 바다를 건넜고 안데스 산맥을 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탐험대원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대원들은 수많은 원주민들을 죽였다. 남미의 여러 부족들은 강에서 조금씩 사금을 채취해서 모았다. 추장은 몸에 금가루를 바르고 금 세공품을 호수 가운데 악마에게 던지며 종교의식을 행했다. 그들에게 금은 똥과 같은 것이고 그것이 악마의 것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다. 탐험대는 호수의 물을 빼내고 금을 찾았지만 그 분량으로는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현대판 엘도라도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재테크로 대박의 환상을 쫓는다. 9월 13일 부동산 대책이 발표되는 그 순간까지 정책을 비웃듯 부동산은 폭등했다. 그들은 돈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화폐의 힘은 이미 좌·우 이데올로기까지 자기 앞에 무릎 꿇리고 포박할 정도로 강력하다. 투기자들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법망을 피하는 방법을 다시 찾아낼 것이다.

19세기 중반 칼 마르크스는 바로 이 화폐숭배의 물신주의에 대해서 여러 권의 저술을 펴냈다. 그는 자본의 자기무한화 운동과 그 마성을 꿰뚫어보았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자기소외와 비인간적 힘에 어떻게 저항하며 극복할 수 있는가, 그는 고심했다. 그는 정의에 입각한 정책이나 대안들이 모두 허위라고 생각했고 잠시 도덕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혁명을 제시했다. 그도 인간의 욕망 앞에 이렇게 좌절했다. 그가 제시한 대안은 유사종교가 되었고 신화화되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실존주의 철학자를 비롯해 수많은 포스트모던 학자들, 심지어 심리학자들까지 나와 우리가 어떻게 타자의 욕망에 희생, 통제되는지 분석했다. 이탈리아의 마우리치오 라자라토는 그의 저서 <부채인간>에서 신자유주의의 최상위 포식자를 금융시스템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금융시스템이 우리를 채무자로 만들고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노예화하는 비참한 현실을 묘사했다. 이처럼 수많은 이들이 물신주의의 원인을 규명했고 깨닫게 해주었지만, 우리를 이러한 악의 구조에서 빼내지는 못한다.

성경은 최상의 포식자가 금융과 자본이 아니라 그것을 조종하는 사탄이라고 말씀한다. 계시록은 그를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라고 말씀한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세상의 욕망을 쫓아간다면, 우리는 여전히 세속신의 노예일 뿐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욕망을 제어하는 방법은 말씀을 아는 것을 넘어서 그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 악의 구조에서 나올 수 있다. 세상이 이 덫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이유는 복종을 모르기 때문이다. 핑크빛 미래의 거짓약속을 믿는 유물론적 낙관주의자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은 기독교의 자발적 순종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모른다.

금리가 어떻든, 시장의 유동자금이 얼마나 돌아다니든, 기독교인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부자 되려고 애쓰는(잠 23:4)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복음은 부자들에게 어울리는 옷이 아니다. 복음은 오히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에게 맞는 옷이다. 부자 청년은 네 부를 가난한 자들에 나누어준 후에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갔다.(막 10:21) 투기로 대박을 노린다는 것은 결국 스페인 탐험대처럼 소박하게 욕심 없이 사는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 일이다. 당시 이들의 폭력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됐다. 똑같은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독교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그 어떤 운동보다도 말씀에 순종하며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일이다. 이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