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메사추세츠 주가 영국과 전쟁을 벌인 상황에서 12개 주들은 참전 여부를 놓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775년 3월 버지니아 주의회가 리치몬드 시의 성요한 교회에서 열린다. 전쟁이냐 굴복이냐를 높고 열띤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사실 식민지는 정규군이 없었기에 본토인 영국과의 전쟁이, 특히 모든 물자를 수입에 의존하던 북미대륙으로선 전쟁물자 조달도 큰 문제였다.

당시 영국은 세계 최강의 나라였다. 두려움에 떨면서 굴복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을 때 주의회 의원이었던 페트릭 헨리가 연단에 오른다. 그리고 그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이라는 격정적 연설을 한다. 이 연설은 버지니아주의회로 참전 결정을 내리게 한다. 이 사람은 독립후 버지니아 주지사에 오른다. 헨리의 연설문은 소책자로 만들어져 식민지 주들로 확산된다.

이와 함께 소책자로 당시 이 전쟁을 독려한 책이 철학자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페인이라는 사람이 쓴 상식(common sense, 1776) 이었다. “미국이라는 대국이 조그만 섬나라인 영국왕실의 학정을 끊고 속국에서 벗어나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다”라는 것이 이 글의 요지였다. 결국 1776년 7월 4일 13개 주 대표들은 필라델피아 주청사에서 미국 독립을 선포한다. 선언문 초안은 장차 건국될 미국 3대 대통령이 되는 토마스 제퍼슨이었다.

그는 독립선언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다음의 분명한 진리들을 믿는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추구의 선천적 권리들을 창조주로부터 부여 받았다.” 독립선언문은 당시 북미 사회의 중심인 교회로 보내진다. 도시 신문을 제외하고는 정보의 유일한 공급처인 것이 당시 교회였다. 독립을 찬성하는 교회들은 예배시간마다 낭독하였다. 교회는 개인의 대소사로부터 국가의 중대사가 까지 논의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당시 독립전쟁을 반대하는 교회는 국교회(성공회)였다. 저들은 명칭도 에피스코팔 교회 즉, 감독교회로 명칭을 바꾼다. 그 외 모든 교회들이 독립을 원하는 ‘페트리어트’의 길에 합류하였다. 영국왕 조지3세는 미국의 혁명을 “장로교도들의 반란”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조지 워싱턴부대의 대령 15명 중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장로들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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