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직 목사(원주 드림교회)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길이 있고 답이 있습니다

요절: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 장순직 목사(원주 드림교회)

중세의 기독교가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바른 복음, 바른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주님이 세웠던 최초의 교회, 복음적인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기 위해 세운 교회를 일컬어 ‘리폼드처치(reformed churches)’ 곧 ‘개혁교회’라고 부릅니다. 개혁교회의 최고의 가치 중 하나가 ‘오직 믿음으로’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요?

신구약 성경에는 ‘믿음’이라는 말이 232번이나 나옵니다. 믿음이란 ‘어떤 사물에 대한 신념과 어떤 사람에 대한 신뢰’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사전적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신학에서 믿음이란 인간이 절대자를 이해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믿음은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계시에 응답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신뢰하는 것, 확신하는 것, 맡기는 것으로써 그분을 내게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께 굴복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을 뿐 아니라 믿음으로 복도 받고, 응답도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길에 서서도 정작 믿음이 무엇인지 잘 모른 채 믿음생활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교회생활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기도를 오래, 많이 하는 것을 좋은 믿음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잘해도 믿음이 전혀 없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사역에 열심히 헌신하고, 헌금을 많이 하고, 예배 출석 잘하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의 척도는 아닙니다. 그렇게 열성으로 교회생활을 하던 사람도 별일도 아닌 작은 시험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끔 제 주변에서 전도하다 보면, 왕년에 신앙전력이 꽤 화려했던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무슨 회장에, 부장에, 찬양대에, 건축위원장에, 재정부장에 이르기까지 정말 한때는 믿음이 좋았다는데 지금은 시험에 들어 교회를 안 다니고 있다는 사람들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참 믿음이 있었다면 한순간에 하나님을 그렇게 떠나 세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건 종교생활이었을 뿐, 진정한 믿음생활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세의 가톨릭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다고 하는 확실한 복음의 진리보다는 미신적 전통과 교리를 따르며 초대교회의 원형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우리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를 ‘오직’과 ‘그러나’로 구분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공덕 사상을 첨가시킵니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행위를 통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 얻는 길이 너무 쉬우니까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래도 내 쪽에서 작은 선행이나 보잘 것 없는 노력이라도 뭔가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한 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신 말씀을 살펴보면 힘을 잃습니다. 주와 함께 낙원에 갈 수 있게 된 강도에게 자신의 공로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자력 구원의 논리는 믿음이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교만한 인간의 종교심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3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앞서 로마서 3장 10절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적인 기준에서 의인은 착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착한 것도 필요하고 성실한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장 17절에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열쇠가 되는 구절입니다.

마틴 루터는 사제의 길을 가는 동안 늘 자신의 죄에 대해서 민감했습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선한 일도 많이 하고, 또 자주 선임 사제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하루에도 몇 번씩 했습니다. 하도 사소한 것들을 가지고 와서 고해성사를 하니까 “제발 죄 같은 죄 좀 가지고 와서 고해성사를 할 수 없겠니?”라는 핀잔을 들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죄의식에 빠져서 정죄당하는 마음으로 양심과 싸우던 루터가 어느 날 로마서를 읽던 중에 문득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마서를 읽으면서 나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하나님의 의’였다. 그때 나는 수도사로서는 흠잡을 데 없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마음이 괴로운 죄인이었기에 도무지 나의 공로로는 그분을 누그러뜨릴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하나님의 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은혜와 순수한 자비를 발휘하신 나머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시는 그 의라는 것을 터득했다. 그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나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이른 기분이었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사람의 의, 율법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에서 나타난 의를 말합니다. 누구도 ‘율법적 행위’나 ‘도덕적 행위’와 같은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바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의 행위를 통해 얻어진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하박국 2장 4절에는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오직 믿음으로’의 사상은 신약의 사도 바울로, 다시 종교개혁자 루터에게로 이어집니다.

그럼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을 보면 믿는 것은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조수석에 모시고 자기중심적으로 인생을 몰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아예 운전석을 예수님께 내어드리고 내가 조수석으로 옮겨 앉는 것이 착한 믿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착하고 믿음 없는 사람이 되기보다 차라리 야곱처럼 덜 착해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께 칭찬을 듣고 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어떤 열심과 노력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 인정될 수 없습니다. 전도서 7장 20절에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온전히 다 지켜낼 수 있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의로워져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로마서 10장 3절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의 공로나 자신의 선행이나 자신의 자격이나 자신의 지식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절대조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나의 구주로, 나의 주님으로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인도의 젊고 유능한 관리 출신인 부스 터커는 그리스도를 만난 후, 영적으로 빈곤한 인도의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영국에 가서 훈련 과정을 마치고 구세군 선교사가 되어 2500명을 주께로 인도한 인물입니다. 터커가 인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거지처럼 살아가던 어느 날, 힌두교 승려가 찾아와 시비조로 논쟁을 걸었습니다. 이때 터커는 승려에게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논쟁 따위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하루에 몇 번 정도 죄를 범합니까?” 승려가 대답을 주저하자 재차 커터가 물었습니다. “하루에 다섯 번 정도? 아니면 열 번 정도? 그러면 50번 정도?” 승려는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라 대답합니다. 이때 터커는 “그러면 하루 10번 정도 죄를 진다고 생각하고 30년을 어림잡는다면 사람이 일생 동안 10만 번 가까이 죄를 범하는 것이 되겠죠? 당신은 도대체 그 죄들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길이 있습니까?”라며 따져 물은 후에, 예수만이 죄인들의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심을 증거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결론은 예수가 답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길이 있고, 답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인류가 구원 얻는 방법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행함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도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를 부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의 행함이 요구되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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