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사적지 지정 앞둔 총회 신앙유산 ⑩군산 개복교회

드루·전킨 선교사의 헌신적 사역 출발점 …
설립 125주년 강력한 선교공동체로 우뚝

군산항을 찾아온 두 종류의 이방인들이 있었다. 한 부류는 빼앗고 지배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총칼을 앞세우고 이 땅에 찾아온 그들은 미끼를 던져 우리 겨레의 재산을 빼앗고, 청춘남녀들을 전쟁터로 끌고 갔다. 그들이 장악한 동네에는 수탈해간 쌀을 쌓아놓는 동네라는 뜻의 ‘장미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정반대의 사람들도 찾아왔다. 섬기고 나누어 주려 온 사람들이었다. 복음을 들고 이 땅에 찾아온 그들은 병자들을 돌보고, 청춘남녀들에게 생명을 살리는 지식과 신앙을 일깨워주었다. 그들의 발길이 닿은 동네에는 하늘의 복을 열어준다는 뜻의 ‘개복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두 명의 선교사가 군산항에 내리며 시작된 군산선교의 역사는 오늘날 개복교회라는 커다란 공동체를 통해 계승되는 중이다. 사진은 개복교회당 전경.

개복교회(여성헌 목사)의 시작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미국남장로교선교부 7인의 선발대 인원이었던 레이놀즈(한국명 이눌서)와 의료선교사 드루(한국명 유대모)가 1894년 3월 30일 인천에서 배를 타고 군산항을 처음 방문해 전도한 것이 이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됐다.

본격적인 군산 선교의 시작은 드루와 함께 윌리엄 전킨(한국명 전위렴) 선교사가 이듬해인 1895년 3월 정식으로 다시 찾아오면서 이루어졌다. 선창가와 인접한 수덕산에 두 개의 가옥을 마련한 선교사들은 한 채는 예배처소로, 다른 한 채는 진료소로 삼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25년 군산교회 역사의 출발이었다.

그들의 사역은 헌신적이었다. 군산을 비롯한 전북과 충남 서해안 일대 마을들을 돌며 복음을 전파하고, 집으로 찾아오는 수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돌보느라 쉴 틈이 없었다. 그들 덕에 죽어가던 목숨을 건지고 새 생명을 얻은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신접한 사람’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심신은 점점 쇠약해져갔다. 자신의 건강과 두 아들까지 잃고 잠시 미국으로 돌아갔던 전킨은 고국 교회에서 선교를 위한 모금활동을 벌이다 1년 만에 다시 군산으로 돌아왔다. 끊임없이 과로를 감수하며 사역을 이어가던 그는 결국 이 땅에서 숨을 거둔다. 전주 기전여학교는 바로 ‘전킨을 기념하다’는 뜻을 담아 학교명을 지었다.

“내가 누워있으면 한국인이 죽어간다”고 중얼거리며 잠시도 쉬지 않고 마을들과 섬들까지 순회하며 병자들을 치료했던 드루 역시 건강 상태가 극도로 나빠져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긴 치료가 필요했던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군산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에서 생을 마친다.

▲ 군산 수덕산공원에 건립된 군산선교기념비.

그들의 뒤를 이은 불(한국명 부위렴) 해리슨(한국명 하위렴) 알렉산더(한국명 안력산) 등도 몸을 아끼지 않는 사역으로 한국인들을 감동시켰다. 그 사이에 군산교회는 무럭무럭 자라갔다. 1896년 7월 20일 송영도 씨와 김봉래 씨가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후, 농부 어부 장사꾼 등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며 선교사들의 다정한 이웃이자 성실한 동역자가 되었다.

하지만 군산에 정착하는 일본인이 늘어나 거류지역이 확장되면서 군산선교부는 멀리 궁멀(현재의 구암동)로 이전한다. 교회와 진료소까지 구암동산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남은 성도들은 계속 자체 예배를 드렸고, 이들을 이끈 얼(한국명 어아력) 선교사와 최홍서 조사 등을 중심으로 구복동에 새로운 교회당이 건축된다. 군산교회에는 ‘개복동교회’라는 새 이름도 생겼다.

마침내 1911년 김필수 목사가 첫 한국인 담임목사로 부임하고, 홍종억 장로가 임직하면서 개복교회 당회가 조직된다. 이후 개복교회는 군산은 물론 한국교회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는 공동체로 성장한다. 김필수 홍종필 등 두 명의 총회장을 배출했고, 1931년에는 전북 최초로 영신유치원(현 개복유치원)을 개원하며 기독교교육의 산실 역할을 했다.

1919년 궁멀에서 발원한 군산 3·5만세운동 당시에는 김성은 유희순 전종익 정지선 홍종억 개복교회 성도들도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고, 6·25 한국전쟁 중에는 교회를 끝까지 지키던 청년회장 백형기 집사와 고인영 성도가 순교의 길을 걸었다.

이런 역사들을 기리기 위해 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은 1994년 3월 30일 새벽 5시에는 김종석 목사의 인도로 과거 선교사들이 상륙했던 군산 부두에서 기념 예배가 열렸다. ‘100년 전에는 복음을 수입하던 항구가 이제는 복음을 수출하는 항구가 되게 해주옵소서’라는 간절한 기도가 올려졌다. 그 기도가 응답받아 오늘날 개복교회는 강력한 선교공동체로 자리잡았다.

그로부터 다시 4반세기를 지나 설립 125주년을 맞이하면서 개복교회는 제103회 총회를 통해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로 지정받는 영예도 얻었다. 뜻깊은 해에 담임목사로 부임한 여성헌 목사는 ‘비전의 항구’로 우뚝 서는 개복교회의 모습을 새로운 청사진으로 제시한다.

드루와 전킨이 군산항에 닻을 내리고 써내려가기 시작한 복음의 역사가 이제는 개복교회라는 거대한 복음선이 돛을 올리며 다시 한반도 곳곳과 오대양 육대주로 뻗어나가는 중이다.

▲ 선교사들 그리고 믿음의 선배들이 전해준 복음의 능력으로 개복교회를 ‘비전의 항구’로 만들어가겠다고 다짐하는 여성헌 목사.

여성헌 목사는 반년 전 개복교회 제15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군산선교의 주역이었던 전킨(한국명 전위렴)과 해리슨(한국명 하위렴) 선교사에 이어, 한국인 최초 장로교 총회장을 지낸 김필수 목사, 전북노회 초대노회장이었던 이원필 목사, 제19회 총회장 홍종필 목사, 그리고 최근에는 김종석 최광렬 목사 등 쟁쟁한 인물들이 거쳐 갔던 담임목사직을 이어받은 것이다.

“우리의 오늘이 있게 한 과거를 발굴하고 정립하는 일에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내년은 교회 설립 125주년과 군산노회 조직 8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잘 준비해서 온 교회가 바른 역사관을 정립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서 개복교회는 요즘 분주하다. 교회역사를 소개하는 안내판을 새롭게 세우는 작업이며, 각종 역사자료를 수집하고 사료관을 정리하는 작업, 기념관 건립을 준비하는 작업 등이 한창이다. 하지만 여성헌 목사는 이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과업이 있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역사와 전통이라는 기초 위에 미래세대를 잘 가르쳐 든든히 세우고,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일이지요. 이를 위해 다섯 단계의 양육과정을 새롭게 도입해 리더들을 양성하고,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주로 다루는 바이블아카데미를 개설해 성도들의 평생교육이 이루어지도록 시도하고 있습니다.”

여 목사가 기대하는 최종 목표는 개복교회가 세상을 위한 ‘비전의 항구’가 되는 것이다. 민족을 치유하고, 열방을 섬기고, 다음세대를 세우고, 세상을 축복하며, 성령으로 하나 되며, 끊임없이 개혁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 그리하여 지친 이들에게 피난처 역할을 하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대역할을 하는 항구교회(Harbor Church)로 우뚝 서는 꿈을 꾸는 중이다.

 

개복교회 역사창고 곧 문 열린다

‘개복동례배당.’ 교회당 꼭대기에 한 글자씩 새겨 넣은 돌판들은 개복교회의 어제와 오늘을 이어주는 상징물 중 하나이다. 지금의 터에 자리잡은 이후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지며 예배당의 모습은 계속 변해왔지만, 이 돌판만큼은 마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에벤에셀’처럼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꾸준히 존재했다.

▲ 예배당 꼭대기에 교회 이름을 새긴 돌판들은 개복교회의 대표적 상징물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치고는 개복교회에 내세울만한 유물들이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전쟁 등 격변기를 거치면서 많은 자료들이 소실되었고, 지나간 세월보다는 현재와 미래에 더욱 충실하고자 했던 오랜 목회적 경향이 반영된 탓이다.

하지만 1994년 교회설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사진전과 유물전을 열고, 2004년에는 오성종 박상선 장로의 주도로 110년사가 발간되면서 제법 많은 역사자료들이 쌓였다. 1947년 예배당 증축공사 당시의 특별헌금 방명록, 1950년과 1951년에 작성된 세례교인 명부 및 교적부, 1952년의 당회문서철 등의 문서들이 대표적이다.

오랫동안 본당 꼭대기층 창고에 쌓여있던 이 유물들은 다시 세상에 나올 채비를 하고 있다. 교회는 이들을 고 김종석 목사가 남긴 유품들과 함께 잘 분류하고 정리해 장차 개관할 역사기념관에 전시한다는 계획이다.

▲ 1940~1950년대에 작성된 교회 주요 문서들.

역사관련 업무들을 담당하는 이성복 목사는 “앞으로 개관할 기념관은 단순한 역사자료를 전시하는 공간에 그치지 않고, 은혜의 역사를 후대에 교육하는 공간으로 역할을 할 것”이라면서 “이와 더불어 한국교육사 과목을 정식 양육훈련 프로그램 중 하나로 개설해 교우들의 역사의식을 높이는 작업도 병행 중”이라고 소개한다.

한편 개복교회 주변에는 초기 군산선교 역사에 있어서 뜻깊은 지점들을 되짚어볼 수 있는 장소들도 즐비하다. 선교사들이 군산항에 처음 도착해 내린 지점인 옛 군산세관 앞에는 표지석이, 군산선교의 첫 무대였던 수덕산에는 전킨과 드루 선교사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군산선교부의 활동무대 중 하나였던 멜볼딘여학교(현 영광여중고)는 개복교회와 담장을 나란히 하고 있으며, 삼일운동 당시 옛 성도들과 학생들의 항쟁지이자 수난지였던 구 군산경찰서 터는 예배당 꼭대기에서 바로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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