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복음으로 세상에 답하다 ③ 세계관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세계관 전쟁은 보고 듣는 것의 전쟁 … 무신론적 세계관의 무분별 전파 심각, 세속화 적극 막아내야

▲ 최재호 목사
·대구성일교회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Ph. D.(변증학)

이전 글에서는 영적전쟁이 왜 세계관의 전쟁인지를 설명하였다. 이번 글에서는 세계관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세계관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세계관이라는 틀을 거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의식적인 행동은 세계관을 통하여 해석된 것이다. 세계관의 진공상태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없다. 모든 행동은 우리에게 들어온 자극이 세계관의 해석을 통하여 나타난 반응이다.

세계관은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의 일상생활과 분리될 수 없는 삶 그 자체이다.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도 없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무엇인지도 전혀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떤 행동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세계관이 작동해서 그렇게 행동한다. 이런 면에서 세계관은 학문적 훈련이나 이론적인 설명 이전의 문제이며, 일상적인 삶의 문제이다. 우리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일상적인 경험으로서의 세계관을 3가지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세계관의 개념 형성과정
사상적인 체계를 갖춘 ‘세계관’이라는 개념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세계관(Weltanschauung)이라는 단어를 제일 먼저 사용한 사람은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이다. 칸트가 처음 사용한 세계관이라는 단어는 철학적 개념을 가진 학문적인 용어가 아니라 단순히 세상을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일상적인 단어로 사용하였다.

칸트에 의해서 감각적 인식의 의미로 사용된 세계관은 독일 관념론 철학과 낭만주의를 거치면서 지성적 영역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단어로 발전하게 되었다. 철학자 헤겔(G.W.F. Hegel, 1770~1831)은 세계관을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절대정신의 자기 인식의 결과물로 이해했다. 그는 역사 발전과정을 경쟁적 세계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적전쟁이라고 설명하였다.

키에르케고르(Soeren Kierkegaard, 1813~1855)는 헤겔의 추상적인 세계관의 개념을 삶의 실존적인 개념으로 정의했다. 그에게 세계관은 실존적인 삶을 이해하는 틀(framework)이었다. 키에르케고르와 같이 실존적인 삶을 강조하는 연장선상에서 틸타이(Wilhelm Dilthey, 1833~1911)는 세계관을 역사적으로 생성된 실체에 대한 관점들이라고 설명한다. 형이상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실체는 유동적인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이런 면에서 세계관의 출발점은 역사적 경험을 통한 삶 자체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기초를 제공하고 무신론 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세계관을 실체와 삶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하나의 관점이라는 좀 더 일상적인 방법으로 정의했다. 니체에 의하면 객관적인 관점은 없으며, 오직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상대적 관점만 있을 뿐이다. 이렇게 되면 사상은 감정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 인간성에 의한 해석의 산물이며, 절대 만족을 주는 해석은 없다. 세계는 무한정의 주관적 해석들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관의 실천적 특성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세계관의 철학적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발견된 몇 가지 특성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헤겔은 역사발전 과정을 경쟁적 세계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적전쟁이라고 설명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세계관을 삶을 이해하는 틀이라고 정의했다. 딜타이는 역사적 삶 자체에 기초한 유동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니체는 세상을 해석하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이라고 정의했다. 어떤 경우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에게 알려져야 할 객관적인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

지만 우리는 그 세계를 항상 각자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한다. 이런 면에서 객관적인 세상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틀로서의 세계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둘째, 세계관의 실천적 정의
앞에서 설명했듯이 세계관은 학문적 훈련과 논리적 설명 이전의 문제이다. 세계관을 일상적인 삶과 경험의 문제로 정의한다면 대략 두 가지로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세계관은 안경이다. 동일한 환경과 장소에서도 무엇을 통해서 보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육안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것과 현미경을 통해서 관찰하는 것을 비교하면 보이는 것이 완전히 달라진다. 육안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과 천체 망원경을 통해서 밤하늘을 관찰하는 것을 비교하면 보이는 것이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이런 예는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물리적인 안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안경이다. 마음의 안경이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을 결정한다. 같은 시대, 같은 사회적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도 각자가 보고 듣고 평가하는 세상의 모습은 완전히 다를 수 있다. 특정한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 비관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보고 듣고 평가하는 것과 낙관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보고 듣고 평가하는 사회의 모습은 다르다. 그 이유는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 마음 속에 있는 마음의 안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세계관은 사물을 보고, 듣고, 생각하는 틀이다. 우리가 어떤 행동이나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게 된다.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서 수집된 정보는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생각의 틀을 거쳐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을 통하여 수집된 정보를 해석하는 생각의 틀이 세계관이다. 사물을 보고 듣고 생각하는 과정을 일관된 유형으로 유지시켜 주는 틀을 다른 말로 정의하면 ‘가치체계’ 혹은 ‘삶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을 보고 듣고 생각하는 틀로서 세계관은 학문적 훈련이나 이론적 설명이 없어도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항상 작동한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면, 경로당에 가서 도토리를 보여주고 무엇이 생각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묵’이라고 답변한다. 초등학생들에게 도토리를 보여주면서 무엇이 생각나느냐고 물으면 거의 예외 없이 ‘다람쥐’라고 답한다. 양쪽의 경우에 똑같은 도토리를 보여주었는데 그들이 연상하는 대상은 왜 다르게 나타나는가? 그 이유는 삶을 통하여 그들 속에 만들어진 보고 듣고 생각하는 틀이 다르기 때문이다.

동일한 사물을 보아도 생각하는 틀이 다르면 나타나는 행동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반죽이라도 붕어빵 틀에 부으면 붕어빵이 나오고, 국화빵 틀에 부으면 국화빵이 나온다. 생각의 틀이 바뀌지 않으면 행동은 바뀌지 않는다. 행동은 세계관의 진공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고 듣고 생각하는 틀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성경적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된 세상을 보고 듣고 생각하는 틀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이다.

셋째, 세계관은 변화될 수 있다
세계관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삶에 기초한 해석의 틀이기 때문에 역사적 환경에 따라서 바뀔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형성된 특정한 세계관은 자신이 살아온 특정한 역사적 환경과 경험에 기초한 삶 자체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세계관은 특정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 국가나 민족과 같은 집단적 단위의 동질성을 가지는 숲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동일한 공동체 안에서도 개개인의 삶의 환경과 경험이 다르듯이 개별적 다양성을 가지는 나무의 성격도 갖고 있다. 세계관은 사람들의 생김새와 같이 민족적 단위의 강력한 집단적 동질성을 가지는 반면에, 그 동질적 집단 안에서도 개인에 따라서 대단히 다양한 특성을 가진다.

유동적인 특성을 가진 세계관은 주로 보고 듣는 것에 의해서 변화된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육체적 체질을 바꾸듯이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세계관을 바꾼다. 사회학자들의 의견을 참고하면, 일반적으로 TV 드라마에 등장하는 상황과 현상들이 5년 정도가 지나면 실제 삶의 현장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보고 듣기에 생소한 현상이라 하더라도 TV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보고 들으면 생각이 바뀌어서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외도, 불륜, 이혼, 동성애와 같은 소재가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면 나중에는 그런 것들을 자연스런 삶의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을 우리는 실제로 겪어왔고, 앞으로도 겪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계관은 세상을 보고 듣고 생각하는 틀이다. 실천적인 면에서 세계관의 전쟁은 보고 듣는 것의 전쟁이다. 무엇이 눈과 귀를 장악하고 있는가? 무신론적 세계관을 전파하는 TV 드라마가 성도들의 눈과 귀를 장악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창조질서를 존중하는 복음이 성도들의 눈과 귀를 장악하고 있는가?

보고 듣는 것을 통하여 복음화냐, 세속화냐가 결판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세계관 전쟁의 1차 목표는 교회와 성도들이 세속화되는 것을 막아내는 것이다. 육체적 건강을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것을 다이어트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건강한 세계관을 위해서 보고 듣는 것을 다이어트 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고 듣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마 15: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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