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 40주년 기념 기획] 한국교회 거목 박형룡 목사 ④ 신학자 대담

역사적 격변기 속 한국적 신학 최초로 구현 … 서구신학에 없는 독창적 방향 제시
교단의 신학적 자산 소중히 여길 때 자긍심 풍부 … 정통적 실천으로 뒤받침 해야

죽산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삶을 어떻게 계승하는 것이 좋을지 이상원 교수(총신대신대원)와 박응규 교수(아신대신대원)에게 들어본다. <편집자 주>

 

▲박형룡 목사가 끼친 영향은?

▲ 박응규 교수(아신대 신대원)

=박응규 교수(이하 박):박형룡 목사는 구한말 선교사들이 전해 준 신학을 배웠으나 한국인으로서 자의식을 가지고 신학을 체계화했다. 일제시대, 해방 정국, 한국전쟁, 근대화과정을 겪으면서 역사적 격변 속에서 한국적 신학을 구현해 낸 최초의 인물이다. 개신교 장로회신학의 바탕을 마련한 인물이며 그의 표현대로 신학적 방향을 제시했던 ‘지로적(指路的) 신학자’였다.

그의 신앙 한편에는 부흥운동의 영향이 있었다. 어렸을 때 김익두 목사의 부흥설교를 듣고 회심했으며 ‘예수천당’으로 유명한 최봉석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민족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회참여와 독립운동에 가담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신비주의, 무교주의, 자유주의의 도전에 대항하여 보수적 신학을 수호하고자 노력했다. 1930년대~70년대까지 신학교육에 매진했으며 수많은 획기적인 저술을 했다. 장로교 신학의 틀을 세웠고 여러 후학들에게 영향력을 끼쳤다. 올해는 한국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공식결의한 지 80년이 되는 해인데 박형룡 목사는 신사참배에 굴하지 않은 신학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 신사참배 전력자들에게 회개를, 출옥 성도들에게 용서를 외칠 수 있었다. 박 목사는 신사참배자와 거부자들의 화합을 꾀함으로 해방 후 교회가 재건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생각만큼 교회 재건이 진행되지 않자 그는 점진적 개조를 생각하고 신학교육 사역에 역점을 두었다.

=이상원 교수(이하 이):신사참배를 반대했다가 옥고를 치렀던 출옥성도들은 신사참배자들에게 몇 가지 요구를 했다. “공적 회개를 하라, 최소한 몇 개월은 공직에서 떠나라, 치리 절차가 끝난 뒤 복귀하라” 등이었다. 그러나 교단은 이런 요구를 받지 않았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터지면서 모든 목회자들은 어쩔 수 없이 교회를 그만 두게 됐다. 많은 교역자들이 부산에 모였을 때 박형룡 목사는 철저한 회개운동을 전개했다. 박형룡 목사는 출옥성도들의 요구가 전쟁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자연스레 해결되었다고 보았다. 목사직도 내려놓았고 회개운동에 동참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합을 촉구했던 것이다.

한편 박형룡 목사의 신학이 루이스 벌콥의 신학을 번안한 수준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나는 박 목사의 조직신학과 변증학 책들을 읽으면서 박 목사의 신학이 매우 독창적임을 깨달았다. 그분의 신학을 잘 계승하면 한국 현대 신학이 나아갈 방향을 구축할 수 있다. 박 목사의 신학을 폄하하는 것은 서구신학의 흐름을 구분해서 바라보지 않는 데서 생긴 것이다.

서구 개혁신학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스코틀랜드에서 시작해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로 이어 온 장로교신학이다. 이성을 중시하고 고전주의 증거주의 변증학적 입장을 띈다. 속칭 구 프린스턴학파다. 증거주의 변증학은 접촉점을 강조한다. 이성은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주신 것이기에 비기독교인과 대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변증학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이런 미국 신학은 세계관적 측면이 약하다. 또다른 흐름은 네덜란드 개혁신학인데 이는 세계관주의, 소위 전제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이 전통에 바빙크, 벌콥, 반틸이 들어있다. 이 사조는 하나님의 실재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전제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전제를 가지고 하나님이 누군지를 설명하다보니 하나님에 대한 서술이 풍부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제하고 논의에 들어가기 때문에 비기독교인과 접촉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박형룡 목사는 변증을 할 때는 프린스턴의 고전적 증거주의 변증학을 채용했고, 조직신학을 증거할 때는 네덜란드의 전제주의적 방법론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를 종합해서 미국이나 네덜란드에서 발견할 수 없는 조직신학과 변증학의 체계를 세웠다. 이런 종합적 시각은 서구 개혁신학에 없는 것이다. 이런 시도를 한 사람은 누구도 없었기에 박형룡 목사의 신학적 틀은 상당히 독창적이다. 이런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방향을 제시했다.

또 서구신학은 미국이나 유럽이나 할 것 없이 합리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믿지 못했다. 심지어 리처드 개핀이나 바빙크도 합리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흔적이 있다. 그런데 박형룡 목사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여서 신학에 반영했다. 예를 들어서 박 목사는 리처드 개핀이 인정하기 어려웠던 방언의 은사를 믿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대로 믿는 성경관을 가졌다. 이같은 박 목사의 성경관은 우리가 잘 계승해야 한다.

박형룡 목사는 과학의 장점과 한계를 명확히 지적한 공헌도 있다. 박 목사의 과학에 대한 관점은 오늘날 읽어도 유익하다. 또 박 목사는 신학의 핵심철학을 일평생 유지했다. 자유주의신학자는 초기와 후기의 신학이 다르기가 일쑤이고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바꾼다. 일평생 신학적 입장을 변함없이 견지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박 목사의 신학적 약점은?

=박:박형룡 목사가 신학적 일관성을 유지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비판과 변증에 치우치다보니 문화변혁적이고 시대를 아우르는 포용력이 약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는 박 목사가 1930년대 전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 귀국 후 당면했던 유물론, 성경고등비평, 진화론의 도전에서 보수신학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 이상원 교수(총신대 신대원)

=이:박형룡 목사의 신학에 독창성이 없었다는 평가가 있는데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했다고 생각한다. 박 목사의 저서를 보면 인용 문헌을 원본을 가지고 분석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칼 바르트의 저작을 원문으로 보고 비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평가는 올바랐다. 또 성경신학 관점에서 볼 때 깊게 주석이 되지 않은 상태로 논리가 진행되는 부분이 발견된다. 성경신학자와 조직신학자의 성경 읽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신학적으로 보완이 필요하다고 본다. 박형룡 목사가 사회문제나 문화 이슈들을 다루지 않은 것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한 지적이다. 박 목사는 조직신학자로서 학문에 충실했다. 문화적인 부분의 문제들은 후배들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박:박형룡 목사는 서구신학을 답습하는 데서 탈피하여 한국적 상황에 맞게 신학을 정립했다. 자신이 공부했던 프린스턴신학교의 교수들은 후천년설이나 무천년설을 믿었지만 박 목사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옳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신학적 관점이 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개혁신학을 한국장로교에 뿌리내리려고 상황을 고려하는 유연성도 가지고 있었다.

=이:박 목사가 삼선개헌을 찬성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볼 때는 명백한 오류다. 그러나 박 목사가 당시 정치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판단했던 것은 아니다. 신학자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에서 무신론 공산주의가 교회를 핍박했던 기억을 가지고 상식적인 판단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학을 어떻게 계승할까?

=이:앞으로의 신학은 두 가지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 정통적 신학과 정통적 실천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박 목사는 교회와 신학은 정통신학이어야 한다는 점을 확고하게 제시했다. 이는 우리가 계속해서 계승해야 할 유산이다. 그런데 정통적 신학은 정통적 실천으로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정통적 신학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기독교를 전하는 데 굉장히 필요하다. 누가 기독교인이냐는 질문에 대해 교리적으로 올바른 답변은 구원의 서정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다. 즉 성령이 내주하셔서 양자를 삼으시고 구원받게 하시고 나중에 성화에 이르게 하는 것 등이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세상 사람들에게 와 닿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맞는가 보다’하고 판단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사랑하고 선하게 사는 것을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을 갖는다. 선교와 전도를 위해 전략적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실천이 있어야만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받아들이려는 마음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또 우리가 낳은 신학적 유산을 좀 더 소중하게 생각하여 여겨야 한다. 예를 들어서 모 교단은 교단의 시조인 인물을 절대 비판하지 않는다. 부족한 부분은 덮어주고 긍정적인 부분을 최대한 살려서 연구를 발전시켜 나간다. 이는 어쩌면 학문적으로 정직하지 않은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맥을 유지하면서 연구를 할 때 연구의 열매가 더 빠른 시간에 더 많이 축적된다. 우리 교단도 교단의 신학적 자산을 소중히 여기고 살려나가야 하며 그럴 때 우리가 자긍심을 느끼고 풍부해진다. 박형룡 목사를 비롯한 선배들의 논문이나 저서를 자주 인용하는 것은 한 방법이다. 선배 신학자들이 축적한 실적을 깎아내리기를 반복하면 항상 새롭게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

=박:박형룡 목사는 조직신학의 틀을 훌륭하게 완성해주었다. 박 목사의 신학은 오늘날에도 필요하며 변증에 있어서 유용하다. 그 외형적 모습은 다르지만 박 목사 시대에 교회를 위협했던 유물론이나 과학주의의 도전은 현대에도 여전하다. 신학적 이유 없이 분열의 아픔을 겪었던 교단들 간에는 연합과 화합이 이뤄져야 한다. 신학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분리하는 것은 교회의 장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메이첸 박사를 품지 않고 내쳤던 오늘의 미국 연합장로교회의 모습이 그것을 교훈해 준다.

=이:한국교회의 문제 모두를 박형룡 목사의 신학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그분의 정통적 신학은 옳았고 우리가 계승해야 한다. 정통적 신학을 유지하면서 그에 걸맞는 실천을 보임으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해야 하는 문제는 우리의 몫이다. <끝>

사진=권남덕 기자 photo@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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