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민 목사가 들려주는 상도동 이야기]

예전에는 동네마다 제각각의 작은 빵집들이 존재했다. 부족하지만 서로 이기려고 경쟁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장점을 드러내고 다양성을 통해 고객들의 필요를 맞추었는데 어느 샌가 동네 빵집들이 사라지고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빵집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상도동에도 많은 빵집들이 있는데 거의 프랜차이즈 빵집들이다.

이런 대기업 간판을 단 빵집들 사이에서 홀연히 독야청청하는 빵집이 있다. 점포 앞을 지나가면서 다들 ‘언제까지 버틸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오래 버틴다. 아니 이젠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자녀를 둔 엄마들은 꼭 이집에 간다. 다른 곳에서 빵을 사먹으면 몸에 이상 반응이 나타나는데 이 집에서는 그런 반응이 없단다. 참 신기하다.

2004년 4월 13일, 서울 상도동 숭실대 앞에 토모니 베이커리가 문을 열었다.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이호정 사장은 디저트를 제대로 만들고픈 마음에 제과 공부를 결심했고, 스물아홉의 나이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동경제과학교에 들어가 제과 과정을 전공하고, 자취방 근처 빵집의 슈크림 빵에 반해 매일 하나씩 사 먹으며 빵의 매력을 알게 됐다. 그는 내친김에 제빵 공부도 시작했다. 또 우연히 슈거크래프트(설탕공예)에 반해 그 세계에도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일본에서 슈거크래프트 강사로도 일했을 만큼 그의 욕심과 열정은 뜨거웠다.

10년이 넘는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해 그간의 경험과 경력을 쏟아 부어 선보인 빵집이 ‘토모니 베이커리’다. 주택가 재개발과 맞물려 동네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 데다, 한국 실정에도 어두운 탓에 걱정이 많았던 게 사실. 그럼에도 매일 아침 오븐에서 나오는 빵과 대화하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 ‘매일이 감사하다’고 한다. 일본어로 ‘함께’ ‘같이’라는 뜻을 가진 ‘토모니(ともに)’라는 빵집 이름에는 손님들과 함께 가게를 만들어가고 싶은 그의 간절한 바람을 담았다. 그래서 손님들의 의견을 매일 묻고 다듬어가며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이것이 토모니의 첫 번째 자존심이다.

이 사장은 채소나 과일 등의 신선도를 위해 지금도 새벽시장에 가서 직접 눈으로 상품을 확인하고 구입할 정도로 재료 선택에 공을 들인다. 세월이 흐르면 익숙한 재료 위주로 사용할 만도 한데 그는 점점 더 까다롭게 재료를 고른다. 그것이 토모니의 두 번째 자존심이다. 바로 어린이 손님들 때문이라고 한다.

재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서며 어린아이를 둔 가정의 비율이 현격히 늘어났는데, 동네 아이들이 먹는 빵인 만큼 엄마들이 안심하고 아이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밀가루, 설탕, 유제품이 들어 있지 않은 메뉴도 두었다. 이것 또한 토모니의 세 번째 자존심이다.

더 중요한 것은 토모니의 자존심이 비단 가게 하나의 자존심일 뿐 아니라는 사실이다. 상도동 주민들은 토모니의 자존심을 인정하고, 고객으로서 그 자존심의 결과물에 기쁘게 값을 치르고 있다. 이호정 사장의 꿈은 일흔 살까지 건강하게 토모니 베이커리를 지키는 것이다. 아마도 그가 진짜 지키고 싶은 것은 토모니 베이커리의 자존심일 것이다.

이처럼 동네 빵집에도 자존심이 있는데 오늘날 교회에는 무슨 자존심이 있을까? 과연 교회는 지역사회에 무엇을 보여주고 어떤 인정을 받고 있는가? 세상 사람들은 과연 어떤 교회에 몇 명이 모이는지, 그 교회 담임목사가 누군지, 그 교회 건물의 평수가 어느 정도인지에 크게 관심이 있을까?

사실 교회에 무슨 자존심이 필요하리요. 지역교회는 ‘자존심(自尊心)’이 아니라 ‘주존심(主尊心)’을 지역사회에 꾸준히 보여주어야 한다. 주님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 곧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주님께서 그 지역을 위해 교회를 세우셨다는 확신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이 지역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타나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서 ‘교회의 빛이고 소금’이라 말씀하지 않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대로 이행하는 것이 주님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이 아닌가? 지역에서 그 교회의 주존심을 인정해 줄 때, 주님은 그 교회를 향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하실 것이다. 상도제일교회는 앞으로도 상도동이라는 지역에서 주존심의 진원지로 쓰임 받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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