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김제 만경교회는 그 유산을 소중하게 보존하고 계승하며 한 시대의 증인 역할을 하고 있다.

순교신앙의 기개는 오늘도 살아있다
1950년 대학살에 성도 10명 순교…아픈 역사 기억하며 순교자 후예 긍지 이어나가

징기밍기. 대한민국 땅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일 만큼 너른 평야에, 동진강 만경강의 힘찬 물줄기가 대지를 적시는 풍요의 땅 김제만경을 부르는 이 동네 토박이들의 친근한 호칭이다.

특히나 만경 일대는 먹을거리 걱정 없는 기름진 논밭에다, 온갖 해산물들을 언제라도 건져낼 수 있는 황해바다까지 거느리고 있어 아무리 가난해도 굶어죽는 사람 하나 없다는 명성으로 이웃 동네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행복한 고장이었다.

하지만 1950년 그 뜨거웠던 여름은 달랐다. 한반도를 사로잡은 전쟁의 공포는 이 풍요의 땅도 비켜가지 않았다. 이념, 투쟁, 항거, 보복 그 복잡했던 이미지들이 한바탕 어지러운 춤을 마친 후, 서늘한 가을이 찾아올 무렵 동네 우물과 방공호에서는 비극의 잔해들이 발견됐다.

인민군과 좌익세력에 의해 목숨을 잃은 50여 명의 희생자들, 그 중에는 김종한 목사를 비롯한 10명의 만경교회 성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앞서 전주형무소에 끌려갔던 다섯 명의 청년들도 시신이 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김종한 강성진 강춘길 이남근 최남인 최정렬 유상덕 이정순 곽옥진 유금식 송은숙 송창호 고동순 이옥진 곽병일. 우리는 그들을 순교자라고 부른다.

▲ 용인 한국교회순교자기념관에 전시된 김종한 목사의 유품 성경.

만경교회는 1913년 외서리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복음전파와 교육을 통한 민족정신 선양을 멈추지 않는 기개를 지닌 신앙공동체였다. 전쟁이 벌어지고 인민군이 동네를 점령한 후까지도 주일예배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러나 ‘반공혁명단’이라는 비밀결사 조직에 교회 청년들이 가담한 것이 빌미가 되어 탄압이 시작되었고, 추석 이튿날이었던 9월 27일 새벽 마침내 대학살이 자행됐다. 교회의 종은 이틀이 지난 후 다시 울리기 시작했지만, 사라졌던 교우 15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10월 1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의 행방을 우물 속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 김종한 목사를 비롯한 만경교회 순교자들의 존영에 대해 채의석 장로가 설명하는 모습.

한의사였던 강성진 장로는 발견 당시 양손을 뒤로 굵은 철사에 묶인 모습이었고, 같은 우물에서 발견된 아들 강춘길 집사는 머리를 심하게 맞은 상태였다. 무너진 방공호에서는 한 살짜리 아들을 안은 최남인 집사와 시어머니 유성덕 집사의 시신을 찾아냈다. 3대가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교회 반주자였던 이옥진 성도도 싸늘하게 식은 몸으로 발견됐다. 그녀는 잉태 중이었다. 몇 달 후면 아기 아빠가 될 수도 있었던 남편 최정열 성도 역시 전주형무소에서 총살된 시신으로 돌아왔다. 신학생이었던 그는 반공혁명단 동료들과 최후를 함께 했다.

협박과 배신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중에도 그들은 끝내 신앙을 저버리지 않으며,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고 항거한 믿음의 영웅들이었다.

▲ 만경교회 순교사건의 도화선이 된 반공혁명단의 애국활동을 기리는 기념비가 만경면사무소 앞에 세워져있다.

그로부터 66년의 세월이 흐른 후 문제의 우물가를 찾았다. 당시의 지서는 간판이 바뀌어 그 자리에 남아있는데 우물의 흔적은 사라졌다. 대신 지서 인근의 만경면사무소 앞에 세워진 반공혁명단 추모비가 그날의 비극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오늘의 여행에 동행한 총회역사위원회 부위원장 안홍대 목사는 두 차례나 순교자기념사업부장에 봉직하면서 만경교회와 깊은 관계를 쌓았다. 첫 번째로 재임했던 2009년에는 총회에서 만경교회 순교기념비를 건립하면서 행사를 인도했고, 두 번째 재임기간인 2015년에는 총회순교자 명부에서 누락되었던 만경교회 순교자들 일부를 등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김종한 목사님의 외손자인 김협 장로님이 저희 교회에 출석하고 계세요. 용인의 한국교회순교자기념관에 갔을 때 김종한 목사님의 유품인 성경책이 전시되어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여러 사연이 얽혀있어서인지 더욱 뜻 깊게 느껴지더군요.”

교회당으로 발길을 옮기자 전철희 목사와 채의석 장경문 장로가 반갑게 일행을 맞이한다. 순교기념비가 세워진 앞마당과 역사실로 안내하고, 옛 사진과 당시의 기록들을 보여주며 하나씩 설명하는 이들의 표정에는 자랑스런 순교자들의 후예라는 긍지가 엿보인다.

교회 역사실을 둘러보는 동안 한 장의 사진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두 달 전에 열렸던 전도대강연회를 기념해 온 교우들이 단체로 촬영한 사진이다. 얼마 후에 닥칠 비극은 짐작조차 못한 채 사진 속 인물들은 정답게 나란히 서서, 얼굴에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설령 자신들에게 닥칠 일들을 미리 알았더라도 그분들은 피하거나 굽히지 않았을 겁니다. 순교를 당하기 직전 그분들이 보여주신 당당하고 용감한 모습들을 떠올려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만경교회의 오늘이 있는 것도 바로 그분들의 피땀 덕분이죠.”

먼저 떠난 이들은 순교자의 영예를 얻었고, 남은 이들은 순교자들을 대신해 교회를 지키며 그 신앙을 계승했다. 아마도 천국에서 그들이 다시 모여 나란히 서서 정답게 손 맞잡는 모습이 연출된다면. 그리고 그 자리에 우리도 증인이 되고, 주인공이 된다면.

 

▲ 만경교회가 100년 전부터 기록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는 <교회록>과 <당회록> 원본. 특히 <교회록>에는 6·25 당시의 긴박하고 처절했던 상황들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만경교회 채의석 장로가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풀어, 꺼내 보인 문서들은 한 눈에 보아도 범상치가 않았다. ‘당회록(堂會錄)’과 ‘교회록(敎會錄)’이라는 표지를 단 두 권의 낡은 책자에는 100년의 장구한 세월과, 고난의 시절을 견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특히 1914년 6월 7일부터 기록되기 시작한 <교회록>은 만경교회 순교사적을 증언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교회록의 제104번째 기록에는 6·25 당시 학살이 벌어지게 된 배경과 긴박했던 주요상황들이 상세하게 묘사되어있다. 그 일부 내용을 살펴보자.

“9월 10일 월요일 김제 내무서에서 만경교회 교인 동태를 조사하여 가고, 9월 12일 새벽 미명에 내무서원들이 무장을 하고 최정열 곽옥진 유금식 송은숙 등 네 청년의 가정을 습격하여 체포하여 가고, 같은 날 동틀 무렵 김종한 목사, 강성진 장로, 하창조 집사 등 3명이 또한 내무분소에 유치를 당하였다. 그 이유는 면내에 반공혁명단을 조직하였는데, 단원 십 명 중 4명이 기독교 출신이므로 교회 간부까지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이후 계속해서 벌어진 만경교회 교인들에 대한 체포와 고문, 교회에 대한 탄압과 학살 등으로 이어지며, 순교자 15명의 명단 그리고 남은 교인들이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지내고 무너진 교회를 복구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만경교회에는 당시의 생존자인 김방서 장로의 ‘흑암의 세계’와 송해섭 집사의 ‘6·25 수난 실록’ 등 순교사적을 증언하는 기록들이 여럿 보관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부터 기록된 <세례문답록>, 1961년부터 기록된 <교인명부> 등도 남아있어 순교사적을 비롯한 교회의 세세한 역사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도와준다.

한자에 조예가 있는 채의석 장로는 이들 문서를 잘 보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말로 풀이해 번역하는 작업까지 완료했다. 만경교회는 원본들이 더 낡아 훼손되기 전에 영인본으로 제작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2009년 총회에서 만경교회를 위해 건립해 준 순교기념비의 비문 또한 바로 이 당회록과 교회록에서 글씨를 체자해 제작한 사연이 있다.

기장 총회에서는 만경교회에서 멀지 않은 익산 남전교회의 100년 된 당회록을 교단의 문화재로 지정한 바 있다. 우리 총회도 순교사적지 지정에 이어 역사유적 지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면 만경교회의 이러한 기록물들 또한 문화유산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인정받게 될 것이다.

 

‘순교신앙 기억하라’ 메시지를 듣다

▲ 총회순교자기념사업부장 당시 건립한 김제 만경교회의 순교자기념비를 들여다보는 안홍대 목사(사진 오른쪽). 왼쪽은 현재 만경교회를 담임하는 전철희 목사.

김제 만경하면 어릴 때부터 나라의 곡창이라 불리는 넓은 들판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제게는 만경에 순교유적지라는 이미지가 더 깊이 새겨졌습니다. 6·25 당시 인민군들이 들이닥쳐서는 김종한 목사님을 비롯한 15명의 교인들을 끌고 가, 만경지서 앞마당의 우물에 던져 넣고 무참하게 살해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서부터입니다. 당시 상황의 증인이자 저와 같은 이리노회에서 동역한 송봉호 목사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살벌하고 참혹했던 인민군의 만행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송 목사님은 그 사건으로 어머니가 순교하셨고, 심지어 어머니 등에 업혀있던 어린 동생까지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린 만경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내오면서 환란과 핍박을 극복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며 많은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예배당 앞마당 오른편에 우뚝 세워진 순교자기념비와, 1층 역사관에 전시된 순교자들의 사진을 보면서 문득 느껴지는 무언의 소리가 있습니다. 바로 옛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억하라는, 그리고 오늘의 내 모습을 돌아보라는 메시지입니다. 

안홍대 목사(익산 천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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