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장로교회가 자리를 잡았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 장로교 역사에서 장로들이 보여준 섬김과 봉사는 놀라운 것이었다. 원래 장로 직제는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에서만 성경에 따라 직분으로 도입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적 장로직제를 바로 이해하고 정립해야 한다.

지금 우리 총회 구성원들은 공통적으로 장로를 교인들의 대표라고 생각한다. 교인들이 선택했으니 교인의 대표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문제는 장로를 교인의 대표라고 이해하면서, 장로직을 목사직과 상극관계로 잘못 인식하는 것이다. 장로는 교인의 대표로서 교인들의 이익을 목사 앞에 대변하는 자가 된다. 이 때 목사는 외부로부터 청빙을 받았기에 교회를 한시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게 된다. 여기에서 목사와 장로의 대치관계 내지 불화관계가 생긴다. 이것은 장로직분을 세속적인 차원에서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장로를 세울 때 교인이 투표를 하는 것은 주의 뜻을 분별하기 위한 수단이다. 누가 장로가 되어 주의 교회를 위해 봉사하기에 합당한지 투표를 통해 선출하기 위함이다. 사도행전 1장 24~25절의 증언이 이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장로는 교인들의 대변자가 아니고 그를 불러 세우신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해 봉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에서 장로를 교인의 대표로 잘못 이해하게 된 근거가 있다. 선교 초기부터 미국 장로교회의 교회정치에 나타난 장로에 대한 정의를 분별없이 그대로 받았다. 장로직을 정의하고 직책을 밝히는 대목에서 장로를 ‘교인들의 대표’라고 한 것이다. 장로직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장로교의 정치원본인 웨스트민스터 정치에서 찾아볼 수 없고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정치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이 불행한 표현의 기원은 19세기 미국 장로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 장로교회는 회중교회와 합동을 했다. 회중교회는 장로직을 인정하지 않는다. 회중정치는 일종의 민주정치다. 말 그대로 회중이 하는 정치제도다. 이 잔재가 그대로 한국교회에 전해진 것이다. 이런 이질적 정의가 장로직분을 세속적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장로는 주의 부름을 받아 교회를 봉사하는 그리스도의 종이요, 그의 교회의 한 감독임이 사도행전 20장 29절과 디도서 1장 9절이 증언한다. 장로는 교회의 봉사를 위해 부름 받은 자이다. 목사와 함께 봉사하는 협력자와 동역자, 그가 장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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