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의성상설전시관으로 사용 중인 이 한옥은 주기철 목사와 권중하 전도사 등 순교자들의 숨결이 서려있는 옛 의성경찰서 건물이다.

충절의 고장에 도도히 흐르는 순교신앙
모진 탄압 이뤄진 의성경찰서 사적지 추진… “고난과 승리 상징하는 교육현장 될 것”

▲ 의성지역 삼일운동의 발상지 역할을 한 쌍계교회 전경.

낡은 한옥건물은 굳게 닫혀있었다.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자물쇠를 단단히 채운 문을 열어젖힐 방도가 없었다. ‘의성상설전시관’이라는 간판을 단 이 건물의 정체를, 그 앞을 매일처럼 지나치는 읍내 주민들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80년 전 이 건물 안팎의 풍경은 지금처럼 한가롭지도, 조용하지도 않았다. 수시로 고함과 비명이 난무했고, 공포가 자아내는 살벌한 공기가 감돌았다. 악명 높았던 의성경찰서, 바로 이 건물의 옛 이름이다.

경북 의성은 역사적으로 충절의 고장이었다. 예로부터 국난이 벌어질 때마다 의성의 인물들은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구했고, 어느 누구보다 강직하며 기개를 굽히지 아니한다는 평판을 들었다.

유난히 복음화율이 높았던 의성의 기독교인들 역시 나라사랑의 마음은 다르지 않았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그들은 기미년 만세운동의 선봉에 서며 기꺼이 희생과 수모를 감수했다. 신사참배 거부, 농민운동 교육사업 등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도 앞장섰다. 이런 지역적 분위기 탓에 유독 의성경찰서의 기독인과 애국지사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극심했다.

특히 1938년 5월 의성교회를 중심으로 벌어진 일명 ‘농우회’ 사건은 그 절정을 보여주었다. 농촌계몽운동을 구실로 조직한 농우회를 통해 일제에 반항하는 행위를 일삼는다는 죄목을 쓰고 의성교회 정일영 목사와 오진문 장로를 비롯한 수많은 중직자들과 청년회장 이재인 등 젊은이들이 끌려와서는 모진 고초를 당했다.

▲ 훗날 순교사적으로 이어지는 의성 농우회 사건의 중심에 섰던 의성교회 전경.

뿐만 아니라 마치 한국교회 전체를 말살하겠다고 작심한 듯이 일제는 대구의 유재기 목사 심지어 멀리 평양에서 사역하는 주기철 목사까지 이 사건과 연루시켜 검속했다. 주기철 목사에게는 생애 두 번째 검속이었다. 그 무렵 경찰서 안의 풍경은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당시 고문의 종류는 검도용 죽도로 구타하기, 구둣발로 차기, 고춧가루물 먹이기, 인두로 지지기와 소위 비행기 태우기 등으로 아프고 숨이 답답하고 전신이 오그라지고 찢어지는 듯한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 6·25 당시 순교한 엄주선 강도사의 순교터에 세워진 고인의 흉상.

오죽하면 경찰서 주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밤마다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질려 집을 팔고 이사하거나, 친척집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고문을 견디지 못한 채 권중하 전도사는 목숨을 잃었고, 후유증으로 실성한 목회자도 있었다.

지옥과도 같았던 7개월 동안의 옥살이를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간 주기철 목사는 부임 직후 산정현교회 강단에 올라 한국교회사 뿐 아니라 세계 순교역사에 길이 남을 메시지를 남긴다. 바로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설교이다.

오늘의 여정에 동행한 총회역사위원회 역사관건립 소위원장이자 대구경북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인 박창식 목사는 ‘5종목의 나의 기원’이야말로 주기철 목사의 순교신앙을 대변하는 설교로 평가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박 목사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그렇다면 의성경찰서는 주기철 목사의 순교신앙의 실질적 산실이 되는 것”이라면서 “주 목사님의 순교와 직접 연관된 유일한 사적지를 잘 보존하고 활용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고 강조한다.

마침 경중노회(노회장:하태봉 목사)가 올 봄 정기회에서 ‘순교자 주기철 목사 일제강점기 의성경찰서 수난 기념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신칠성 장로)를 조직하여 이 일에 발 벗고 나섰다. 위원회는 각종 자료수집과 증언자 인터뷰 등을 통해 옛 의성경찰서 터를 찾아내며, 순교자들과 의성경찰서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 기독교인들이 주도한 의성지역 삼일운동을 상징하는 기념탑.

지난달에는 ‘일제강점기 의성경찰서, 농우회 사건과 주기철 목사 수난’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며 자료집을 발간했고, 이를 근거로 의성경찰서를 순교사적지 혹은 역사사적지로 지정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나섰다.

위원회 실무를 맡고 있는 추성환 목사(철파교회)는 “의성경찰서가 사적지로 지정될 경우, 지역교회들의 풍성한 순교유산들과 연계해 주기철 목사님은 물론 한국교회 순교자들의 고난과 승리를 상징하는 교육현장으로 훌륭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의성 일대에는 농우회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의성교회(남세환 목사)를 비롯해, 권중하 전도사가 순교 당시 사역했던 여러 교회들, 6·25 당시 순교한 엄주선 강도사의 순교터와 순교테마공원, 기독교인들이 주도한 의성지역 삼일만세운동의 시발점에 세워진 기념탑과 기념공원, 만세운동 발상지인 쌍계교회(서보율 목사) 등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명소들이 산재해 있다.

전남 영광과 여수, 충남 강경과 경남 창원처럼 경북지역에도 과연 기독교의 순교성지가 탄생할 수 있을까. 총회와 전국교회가 의성을 주목하며, 힘찬 응원을 보내야 할 이유는 충분하고 분명하다.

▲ 의성 중리교회에 세워지는 권중하 전도사의 순교기념비.

“권중하 전도사는 일본 제국주의의 포악정치 하에 의성군 춘산면 옥정, 금천, 빙계, 효선교회 등을 맡아 교역하고 있었다. 1938년경 신사참배거부 문제로 의성교회 정일영 목사와 같은 시기에 의성경찰서에 검거되어 참혹한 고문을 당하여 거의 죽게 되자, 1939년 일본경찰은 권중하 전도사를 출감시켰으나 혹독한 고문의 여독을 회복하지 못하고 얼마 후 상주 함창에서 순교하였다.”

<의성교회 100년사> 94페이지에 게재된 이 짧은 기록은 또 한 명의 순교자를 발굴하는 단초 중 하나가 됐다. 바로 경신노회(노회장:임창대 목사)의 헌의로 올 가을 총회에서 정식 순교자 명부 등재를 앞둔 권중하(혹은 권중화) 전도사의 이야기이다.

▲ 효선교회도 순교자 권중하 전도사의 행적을 자랑스레 설립 100주년 기념비에 새겨놓았다.

권 전도사는 개인 신상서류나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고, 묘소와 유족의 존재는 물론이고 심지어 정확한 이름조차 현재로선 확인할 길 없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대구 효목교회 윤두환 원로목사를 비롯하여 고인의 생전 모습과 처절한 순교의 과정을 기억하는 증인들이 아직까지 남아있어 늦게나마 그의 신앙과 삶을 기리는 사업이 가능하게 됐다.

윤 목사는 자신의 어린 시절 자택에서 종종 유숙했던 권 전도사의 모습을 추억하며, 고인은 약 1년간 계속된 가혹한 고문에도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 숨졌다고 증언한다. 특히 몽둥이로 고문을 당해 온 몸이 멍이든 채 집으로 찾아온 고인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적도 있다고 말한다.

공식 문서상으로는 경북노회 제36회 회록에서 춘산지방 효선교회 외 5개 교회를 권중하 전도사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제42회 회록에서 의성시찰회의 청원을 받아들여 권 전도사의 추도식을 거행한다는 결의 내용을 각각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생전에 돌보았던 교회들은 한 결 같이 역사 속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권중하 전도사를 기억하고 있다. 효선교회(정권억 목사)는 설립 100주년 기념비를 건립하면서 권 전도사의 사적을 비교적 상세히 비문으로 새겨놓았다. 중리교회(옛 빙계교회·고관규 목사)에도 고인이 생전에 사역했던 당시의 예배당과 강대상 풍금 등 관련 유산들이 남아있다.

총회순교자기념사업부(부장:손원재 장로)는 심의와 현장실사를 거쳐 제101회 총회에 권 전도사의 순교자 명부 등재를 청원하는 한편, 올 가을 중리교회 옛 예배당 앞에서 고인의 순교기념비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순교신앙 복원의 사명은 무엇보다 커

▲ 옛 의성경찰서를 둘러보며 건물의 상태를 살피는 박창식 목사.

경상북도 의성은 순교의 땅이었다. 그동안 숨겨져 있던 역사적 보물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가치를 발하고 있다.

우선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의성과의 관련성이다. 주기철 목사는 1938년 8월 제2차 검속으로 의성경찰서에서 7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최근에 당시의 의성경찰서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의성경찰서와 관련한 순교자는 주기철 목사보다 앞선 1939년에 이미 발생하였다. 당시 의성의 중리(빙계) 등에서 순회 목회하던 권중하 전도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의성경찰서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순교하였던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중인 1951년 2월 17일에 또 한 분의 순교자가 의성에서 발생하였다. 의성 다인면 출신으로 청송 화목교회를 목회하던 엄주선 강도사는 새벽에 홀로 기도하던 중에 갑자기 공산군 패잔병들이 들이닥쳐 교회와 사택을 공격하는 중에 납치되었다.

그는 의성 춘산의 골짜기로 끌려가 공산군 10사단장으로부터 믿음을 버릴 것을 회유 받았지만 거절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총검에 열아홉 군데나 찔려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조용하게만 보였던 농촌지역이 이처럼 순교의 신앙으로 뜨거운 곳인지 미처 몰랐다. 그동안 우리의 역사의식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의성을 돌아보며 절감하였다.

비록 늦은 감이 있으나 총회역사위원회의 사명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새삼 생각하게 하는 곳이 바로 의성이었다.
박창식 목사(대구 달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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