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 폐하 만세를 목청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피는 뿜어서 누런 흙 위에 검게 엉기인다. 형아, 아우야 이 피는 너들의 피다. 너들의 뜨거운 피가 2300만 너들의 피가 내 몸을 통해서 흐르는 것이다.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 반도의 무리가 님께 바친 처음의 피다.” 주요한의 시 <첫 피>의 전문이다.

이 시는 1938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래 실시한 지원병에 최초로 전사한 이인석이란 청년의 주검을 찬양케 한 시다. 주인공 이인석은 충복 옥천 출신의 청년으로 지원병 1기를 1938년 12월 수료했다. 이인석은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옥천농업실수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의 조교수로 2년간 근무한다. 그 후 지원병 모집에 입대, 1939년 6월 22일 중국 산시성 전선에서 전사한다. 싸늘한 주검이 되어 고향으로 보내진 이인석은 젊은 처와 세 살 된 딸의 오열 속에 안장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인석을 애국의 화신으로 만들기 위해 주요한을 협박해 <첫 피>라는 시를 쓰게 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충군애국의 모범 이인석에게 조선인 최초로 제국의 1급 무공훈장에 해당하는 금치훈장을 수여하고 그의 죽음을 내선일체의 모범으로 찬양했다. 저들은 계속하여 ‘장렬 이인석 상등병’이라는 제목으로 유성기 음반을 만드는데 이것이 1942년이었다. 이인석의 일대기를 영웅적으로 묘사한 일본정통음악 나니와부시였다. 이는 일본전통음악인 샤미센에 맞추어 서사적인 내용을 노래하는 것으로 우리의 판소리와 유사한 노래였다. 박완서는 그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이인석이라는 상등병을 영웅 취급해 그의 일대기를 창극화한 노래가 그 당시에 불렸고 여기에 대한 조선인의 거부감을 피력하고 있다. 조선 총독부는 조선의 청년들에게 제2의 이인석이 되라고 부추겼고 급기야 일본은 이인석을 천황을 위해 전사한 군인들을 기리는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한다.

그 후 1943년에는 경성에 건립된 호국신사의 제신으로 옮겨졌다. 이인석이 신이 된 것이었다. 일제는 이인석의 이야기를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1944년에는 이인식의 이야기가 <너와 나>라는 영화로까지 제작되면서 조선 청년을 사지로 모는 데 이용했다. 이인석의 죽음은 당시 조선인의 죽음이 총독부에 의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슬픈 이야기로 나라 잃은 망국 설움의 단면이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