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개혁주의 모델 박윤선 목사 - ①박윤선 목사는 누구인가

국내 첫 성경전권 주석한 주경신학자이자 교육가 …
신학 보수와 목회자 양성에 지대한 영향

▲ 박윤선 목사

고 정암 박윤선 목사(1905~1988)는 한국교회 개혁주의의 모델이라고 일컬어진다. 성경 전권 주석이라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운 신학자요, 훌륭한 신앙인격자요, 올바른 목회자 양성에 진력했던 교육자였다. 또 교단정치에 편승하지 않고 학자의 길을 우직하게 걸어가다가 여러 가지 고통을 겪기도 했던 한국장로교회 근현대사의 증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올해 박윤선 목사 소천 30주기를 맞아 그의 신학과 삶을 회고해본다. <편집자 주>

고 박윤선 목사를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고려신학교 교장(1948~1960), 총회신학교 교장(1979~1980), 합동신학교 교장(1980~1985)이라는 직책들이다. 20세기를 이끌었던 기라성 같은 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있었지만 세 개 교단 신학교에서 모두 그를 교장(지금의 총장)으로 모셨다는 것은 그의 학문과 인격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1905년 평양북도 철산 출생인 박윤선 목사는 어렸을 때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그는 비상한 기억력을 소유했던 학생이었으며 어학에 남다른 자질을 나타냈다. 숭실대학교와 평양신학교에 입학해서도 히브리어 헬라어 영어 등을 공부하는데 힘썼으며 공부와 더불어 새벽기도와 산기도 등 기도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박 목사의 어학 능력과 기도 열심은 일평생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한국인 최초로 성경전권 주석완간이라는 금자탑을 쌓는 자양분이 되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암스텔담자유대학에서 공부하면서 국내에 개혁주의신학사상을 소개했으며 저서와 기고, 강의를 통해 고 박형룡 박사(1897~1978)와 더불어 한국교회의 보수신학을 지탱했다. <박윤선 주석>을 읽지 않은 목회자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소천한 지 30년이 되었지만 교파를 초월해서 한국장로교회 목회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남아있다.

국내 최초 성경주석 완간

수많은 목회자 가운데 고 박윤선 목사를 기념해야 할 첫 번째 이유는 그의 신학적 업적이 한국교회 장로교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박윤선 목사는 주경신학자라고 불린다. 박 목사는 1945년 만주에서 <요한계시록> 집필을 시작한 이래 35년의 시간을 투자해서 성경 66권 전권을 주해했다. 지금까지 한 개인이 성경 전권을 주해한 예는 세계적으로 드물기에 박윤선 목사의 <성경주석>은 존재 자체로 한국교회 신앙의 열정과 수준을 세계에 알린 보물이다.

<성경주석>의 발행은 당시 목회자들에게는 설교에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았고, 내용적으로는 최신의 성경연구 자료를 담은 학문성 높은 저술이었다. 오늘날 수많은 주석들이 간행되었고 온라인을 통해서 세계 각국의 자료를 볼 수 있지만 박윤선 목사의 <성경주석>은 아직도 애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박윤선 <성경주석>이 1000편에 달하는 설교 요약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 목사는 목회자들이 주석을 통해 성경본문을 이해했으면 설교에 적용시켜 성도들에게 신선한 꼴을 전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주석과 설교요약의 내용은 지금 활용해서 강단에서 사용해도 새롭게 느껴진다.

▲ 고 박윤선 목사가 신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는 모습. 그의 가르침과 설교는 항상 힘이 있었고 열정적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는 6월 30일은 <성경주석> 완간으로 널리 알려진 박윤선 목사 소천 30주기다. (사진 제공=도서출판 영음사)

박윤선 목사를 기념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그의 생애를 통해 한국장로교회 근대사의 공과 과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윤선 목사는 모두가 그를 필요로 했던 인물이었으나 그는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다. 평생 기도와 말씀연구에만 매진한 천상 학자였다. 그래서 그는 총신, 고신, 합신의 교장이 될 수 있었고 될 수 밖에 없었다. 박윤선이라는 이름 석자만 있으면 학생들이 학교를 찾아왔기에 장로교단의 분열과 연합이 반복되고 신학교가 세워졌던 1960대 전후 신학교의 주춧돌을 놓는데 그는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다. 신학교에서 그는 참된 목회자를 양성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게으르지 않고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여 실력이 뛰어난 목회자, 기도와 목양에 헌신된 목회자, 뛰어난 도덕성을 가진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모범을 보였고 엄격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교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박윤선 목사의 존재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1946년부터 고려신학교 교장 직무대행과 교장으로 사역했으나 1960년 주일날 택시를 타고 외국인 선교사 환송예배에 가서 설교했다는 죄명으로 교단에서 퇴출됐다. 총회신학교에서는 1963년부터(6년간 미국체류기간을 제외하고) 1980년까지 가르치고 교장직책 등을 감당했으나 제70회 총회를 기점으로 교권 교체가 일어나는 가운데 학교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박윤선 목사는 전면에 나서서 적극적으로 항의를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교권으로부터 교육권은 독립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기도와 말씀의 사람

박윤선 목사를 기념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그의 신앙이 오늘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박윤선 목사의 기도생활에 대한 에피소드는 매우 많다. 신학교 시절에 산정현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하는데 너무 열심히 해서 출입금지를 당했다든지, 택시를 타고 가면서도 기도하다가 운전기사에게 술취한 사람으로 오해를 받았다든지하는 것들이다. 말씀과 연구에 집중했기 때문에 자주 건망증 증세를 보였고, 식사를 할 때 반찬을 빼앗아가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해내려온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박윤선 목사가 사랑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합신에서 가르칠 때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여성신학자를 교수로 채용하고 강단에 세웠다. 실력이 있다면 신학적 색깔이 달라도 겸손히 이야기를 청취할 줄 알았다. 목회자의 권위를 강조했으나 권위주의는 싫어했다. 제자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에는 편지를 써서 정중히 사과했다. 동산교회에서 시무할 때 그의 설교를 듣고 개종한 한 통일교 교주의 참모 출신 교수가 했다는 말은 유명하다.

“박윤선 목사님께서 하시는 설교를 들으면서 아직은 개혁주의 신앙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만약 박 목사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면 저토록 설교 때마다 생명을 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두가 성경주석을 쓸 수 없고 신학교 교장이 될 수 없으며 박윤선 목사와 같은 인격과 실력을 갖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닮고자 노력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정암 박윤선 목사 연보]


 학력
1913-1922 서당에서 한학 수학
1924.3 신성학교 입학, 기독교로 개종
1931.3 평양 숭실전문학교 영문과 졸업
1934.3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1936.5 미국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신학석사(Th.M)
1938.9-1939.11 위 신학교에서 변증학 및 성경원어 연구
1953.10-1954.3 화란 암스텔담 자유대학에서 신약학 연구
1954.9 미국 훼이스신학교 명예신학박사(D.D) 학위 수득
1979.9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D.D) 학위 수득

 약력
1905.12.11 평안북도 철산에서 출생
1936.8-1938.7 평양 장로회신학교 성경원어 강사 및 장로회 총회표준성경주석 편집부 근무
1940.4-1941.3 만주 봉천(현 심양) 오가황교회 목회
1941.4-1943.7 만주 봉천동북신학교 교수
1944. 4 첫 주석 <요한계시록 주석> 저술
1946.9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서리 취임
1948.5-1960.10 위 학교 2대 교장 역임
1960. 9 고려파를 떠남
1961.2-1964.4 서울 동산교회 목회(서대문)
1963.3 서울 총회신학교 교수 취임(사당동)
1964.1-12 총회신학교 교장(윤번제)
1965.3-1967.2 총회신학교 부산분교장 및 교수
1968.6 서울 한성교회 개척
1967.3-1974.11 총회신학교 교수
1971.9-1977.5 미국 체류
1977-1979 미국 LA에서 주석 집필
1979.3 서울 총신대학교대학원장 취임
1979.10 마지막 주석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주석> 출간, 성경주석 완간 감사예배(총신대학교 대강당)
1980. 10 총신대학교대학원장 사임
1980.11-1985.2 수원 합동신학원 초대 원장
1985.3-1988.6 수원 합동신학교 명예교장
1988.6.30 소천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