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건 목사(제주 동홍교회)

가을은 아름다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계절이다. 여름 내내 싱그럽던 잎사귀가 단풍으로 물들어 저녁노을처럼 한껏 아름다움을 발산하지만 떨어지면 곧 낙엽이 되기에 아쉬운 것이다. 이처럼 계절이 주는 영음은 한국 교회가 직면한 오늘의 안타까운 현실과 너무나도 흡사해 애처롭기까지 하다.

30여 년 전만 해도 한국 교회는 청청한 생기로 부흥일로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추풍낙엽처럼 질과 양에서 하향 그래프를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두 가지 동인이 있는데 그 첫째가 교회의 세속화로 봐야 한다.

교회는 예수께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라고 가르치셨듯 지혜와 순결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서 사도 베드로가 요청한 “진리의 순종으로 깨끗한 영혼과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정적으로 순결하고 동적으로는 뜨거운 사랑의 용광로가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초대교회의 모습이었다.

16세기 교회의 모습에는 진리의 순종이 불가능했다. 그 당시에는 성경 자체를 읽을 수도 없었지만 읽지도 못했기에 종교의식이나 형식에 매인 종교인의 삶만 가능했다. 교회라 해도 교회다운 말씀 중심의 생명공동체라 부르기도 어려웠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처럼 오늘날도 또 다른 세속화가 교회에 침투하고 있다. 바로 교회 세습화 및 교계 지도자들의 비리와 적당주의 신앙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합리적이라는 데 설득력이 있을 수 있지만 사실은 교회뿐만 아니라 신자 모두의 순수성을 잃게 만든다.

또 다른 하나는 종교다원주의 영향에서 비롯되는, 이른바 기독교가 타 종교 속으로 전이하는 하향 평준화 현상이다. 이는 절대 진리 자체를 부정하게 되면서 기독론과 구원론, 교회론 등의 권위 추락이다.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 교회 민주주의와 권징의 신실한 집행 자체가 위기를 맞게 된다는 점이다. 이미 상당수 교회가 권징 집행 자체를 포기한 듯 보인다. 교회가 현실과 타협해 버리면 복음의 본질이 손상되고, 항의를 해서라도 진리를 사수하려면 환란을 맞을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상태에서도 해결의 실마리는 있다. 어려운 때일수록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과거 초대교회는 핍박이 많았음에도 사도행전 2장 47절에서 보여주듯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같은 역사를 만들어 갔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에서 95개조의 항의문을 발표하면서 종교개혁의 봉화를 든 지 499주년을 맞는 기독교회는 이제 제2의 종교개혁을 일궈야 할 때를 맞았다. 물질주의, 편리주의, 세속주의 위기 상황에서 적당주의에 안주하지 말고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

첫째, 개혁교회는 쉬지 않고 개혁되어야 한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둘째, 교회가 교회답게 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해 오직 성경에 기초한 신앙교육을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한다.

셋째, 개혁을 통해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말씀을 보수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증인이 되어야 한다. 보수신앙도 열려야 하고, 위선적 보수신앙도 진실된 보수신앙으로 변해야 한다. 공리공론에 그치는 보수에서 삶의 현장과 연결된 실천적인 보수신앙으로 변해 가야 한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한국 교회 성도는 대략 20만 명으로, 오늘날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신자들이었지만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16인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는 당시 신앙이 곧 삶이었고, 그 삶은 정직과 성실의 열매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드러냈음을 보여준다. 16세기 개혁이 진리와 신학 사상의 개혁이었다면 21세기의 개혁은 믿음으로 의로워진 백성으로서의 삶을 치유하고 살리는 생활신앙의 개혁이어야 하며 대신(對神), 대인 관계의 회복으로 복음진리의 균형을 맞추고 조화로운 삶을 향한 개혁이라야 한다.

일찍이 정통신학자 새뮤얼 G. 그레이그 박사의 “성경 없이는 교회도 없다”는 말은 기독교회가 성경에 근거한 믿음의 공동체요, 그 믿음이 삶으로 연결된 생활신앙임을 강조한다.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 들어온 세속주의, 상업주의가 교회의 사명을 부패하게 했다는 지적이었다. 지나친 형식주의가 개교회주의의 성공 지상주의로 복음의 본질을 떠나게 하여 결국 맛 잃은 소금처럼 사람에게 밟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그 정체성을 지킬 때 구원의 방주요, 빛과 소금의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제 복음 앞에서 ‘코람데오’ 신앙으로 일어나 빛을 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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